백현의 [City Lights]는 딘을 대표로 하는 국내외의 트렌디한 힙합 R&B 스타일을 자신의 이미지에 이식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앨범이었다. 첫 앨범의 역할이나 목표란 으레 그렇다. 특정한 장르나 이미지,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며 '나는 이런 음악을 하는 사람이다'를 천명하는 것이 우선된다. 태민의 '괴도(Danger)'에는 마이클 잭슨의 흔적이 뚜렷했고, 규현의 '광화문에서'에는 성시경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레퍼런스의 선별과 실험을 반복하며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이 팀에서 솔로로 데뷔한 멤버들이 정석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밟아온 절차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발표하는 두 번째 앨범은 에고를 덜어내고 태도적으로는 가벼운 무게를 가지려는 경향을 띤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역시 [ I ]에서 [My Voice]로 넘어갔던 태연이 그랬고, [사월, 그리고 꽃]에서 [사랑하는 그대에게]로 넘어갔던 첸도 그랬다. 백현의 [Delight] 역시 마찬가지다. [City Lights]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사운드와 태도에 있어 한 발 물러난다. 그러나 전략이 비슷하다고 목적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같은 팀의 멤버인 첸이 발라드라는 장르 자체에 집중하며 하나의 주제와 다양한 해석을 담은, 전통적으로 잘 짜여진 앨범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다면, 백현은 조금은 다른 것을 전달하려 한다.
ⓒSM엔터테인먼트
[Delight]는 비슷한 장르나 스타일의 곡들이 그러하듯, 쉽고 편하게 들을 수 있는 R&B를 지향한다. 전작과 비교해도 그렇다. 날카롭게 들릴 수 있는 모든 소스를 지양하고, 사운드를 부드럽고 풍부하게 조절한다. SM엔터테인먼트 특유의, 촘촘하게 쌓아 올린 사운드 레이어를 정면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어느 정도의 공감각을 전달하는 유연성을 갖추기도 했다. 깊은 베이스 위에 감각적인 신스 사운드를 희미하게 퍼뜨리는 'Candy'는 이 앨범이 지향하는 음악적 기조를 대표하는 말 그대로의 '타이틀'이다. 배경이 되는 사운드를 응축하는 대신 넓게 펴 발라, 백현의 부드러운 보컬이 종종 샤프한 소리로 변모하더라도 날 선 긴장감 대신 여유로운 그루브만이 남는다. 풍부한 사운드의 인상을 첫 트랙부터 내세우니 'R U Ridin'?'의 어느 정도는 뚜렷한 베이스와 보컬이 전달하는 뚜렷한 질감도 중화된다. 세 번째 트랙인 'Bungee'에서는 다시 빈티지한 사운드 소스와 릴렉싱한 리듬으로 응집된 질감을 풀어내며 완급을 조절한다. 후반 트랙들에서도 몽환적인 신스 사운드와 안정적인 리듬이라는 큰 흐름을 적절히 변주하고, 종종 튀어나오는 어쿠스틱 사운드와 백현의 노련한 보컬로 힘을 미세하게 조정한다.
이렇게 하나의 아이코닉한 트랙의 뒤로힘을 조절한 곡들을 교차시키며 배치된 구성은 차라리 '앨범'보다도 '플레이리스트'에 가까워 보인다. 많다면 많은 일곱 개 트랙의 감상에 부담을 최소화한 사운드 조절과 변주는 전통적인앨범으로서도 좋은 구성이지만, 비슷한 장르나 스타일의 곡들을 끊임없이 재생하며 지속적인 감상을 유도하는 유튜브 라디오나 플레이리스트의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백현이 솔로 앨범을 통해 보여주는 힙합 R&B가 특히 이러한 플레이리스트의 주제로 쓰이거나 셋업 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전작에 비해 풍부해진 사운드 믹싱과, 극적인 멜로디 변화의 최소화, 도회적인 이미지와 질감 모두 유튜브를 중심으로 짜인 새로운 음악 감상의 법칙들이다. [Delight]은 단지 전작의 기조를 좀 더 감상자 친화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아이돌-솔로의 전통적인 두 번째 앨범이기도 하지만 피지컬 앨범이나 음원 발매만을 신경 쓰는 전통적인 활동 영역에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음악 감상에 녹아들고자 하는 전략을 곡 하나하나의 음악 자체에 적용한 앨범이기도 하다. 편하고 부드러운 사운드와 보컬의 표면을 띄고 있지만 그 아래에는 복잡하고 탄탄한 설계가 있다.
ⓒSM엔터테인먼트
전작에 비해 에고나 귀에 박히는 특정한 키워드를 덜어낸 점도 이 앨범에서는 또 다른 장점으로 작용한다. "한남동 유엔빌리지"로 대표되는 전작의 키워드는 특정한 장소와 음악, 그리고 백현 본인을 하나로 엮으며 뚜렷한 이미지를 전달했다. 그 메세지가 맘에 들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전달력은 확실했다. 그러나 'CANDY'를 포함해 [Delight]의 수록곡들은 하나의 뚜렷한 키워드나 구체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대신 흐릿한 느낌, 그러니까 판타지를 전달하는 데 더 적절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백현의 곡들은 분명히 어느 정도 도회성을 강하게 띄고 있지만, 만약 그 도회성이 한남동의 유엔빌리지라는 매우 특정한 장소를 가리킨다면 그때부터는 단순히 감상자에게 느낌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이 음악이 한남동의 유엔빌리지를 투영하는지를 설득해야 한다는 과제가 생긴다. 이번 앨범에는 그런 특정한 장소나 지점, 혹은 백현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대신 오로지 느낌과 인상만을 전달한다. 이 앨범을 들으며 떠오르는 도회지는 서울의 어딘가일수도, 혹은 뉴욕이나 런던이 될 수도 있다.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백현의 형상을 덮거나, 틴에이저적이면서도 섹슈얼한 컨셉을 오가는 앨범 아트도 비슷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Delight]는 뚜렷하고 샤프하고 구체적일 수도 있었던 모든 요소를 흐릿함 뒤로 가렸다. 곡 하나하나의 존재감을 조각하는 대신 물에 물감을 푼 듯 퍼뜨리고, 캐릭터를 제시하는 대신 판타지를 유도한다. 이야기 대신 느낌을 전달한다. [Delight]는 분명히 잘 만든 앨범이지만 하나의 완성된 앨범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미완과 파편의 영역에 있다. 그렇지만 하나의 완결된 앨범을 그대로의 작품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각조각 나누어 새로운 무언가로 편집해 플레이리스트화 시키는 이 시대의 음악 감상법을 고려한다면 이 앨범은 가장 적절한 재료가 될 수 있다. 음악과 스타일, 그리고 그것을 제시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백현과 [Delight]는 트렌드의 전방에 있다. 그는 완성품을 내미는 대신 질료를 전달했고, 그 질료로 무엇을 만들어내든 그것은 감상자의 자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