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by 카밀리언

 경성의 좁은 골목은 어둠이 일찍 찾아왔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모퉁이마다 그림자가 춤추고, 돌길 위로 급하게 내딛는 발걸음 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止まれ! (서라!)”


 일본 순사의 외침이 골목 끝에서 메아리쳤다. 장무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담벼락을 스치듯 달렸다. 가슴팍에 숨겨둔 폭탄의 무게가 발걸음을 짓눌렀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기 전까지는.


 모퉁이를 돌자 그는 몸을 비틀며 겉옷 자락을 홱 뒤집어 올렸다. 안쪽에 덧댄 천이 드러나면서 외투의 검은색이 순식간에 연한 회색으로 바뀌었다. 곧바로 모자를 벗어 돌돌 말아 쥐고, 얼굴을 가리던 안경을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콧수염을 툭 떼어내자, 완전히 다른 얼굴이 드러났다.


 숨을 몰아쉬며 짧은 안도의 숨을 내쉬던 순간, 맞은편에서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알몸을 들킨 듯, 그의 가슴이 아찔하게 내려앉았다.

 '전부 본 건가…?'


 그러나 그녀는 내 걱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눈빛으로 방향을 고정했다.


차가운 밤공기 속, 그녀의 기모노 끝이 바람에 휘날렸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무대 조명처럼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고, 술기운에 붉어진 뺨은 새하얀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설마 내 쪽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당혹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로 그때, 그녀가 나타난 모퉁이에서 검은 제복의 순사 두 명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어진 순사 한 명의 끈적한 목소리가 무열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おい、セイカ! (어이, 세이카!) いいじゃないか、一緒にもう一杯飲もうぜ! (그러지 말고 우리랑 술 한 잔 더 하지 그래?)”


 옆의 순사가 낄낄거리며 맞장구쳤다.
 “逃げるから、もっと可愛く見えるな! (도망가니까 더 귀여워 보이네!)”


 무열의 손이 본능적으로 가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폭탄과 함께 숨겨둔 권총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는 순간, 여인의 몸이 불쑥 그 위로 안겨왔다. 기모노 소매가 그의 팔을 감싸며 얽혀 붙었고, 총을 꺼내려던 손은 그대로 그녀의 허리와 가슴 사이에 갇혀 버렸다.


 너무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녀의 숨결이 스쳤다. 향기로운 분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순간적으로 취기가 오르는 듯했지만, 곧 이어진 그녀의 말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순사만 다섯이에요.”


 무열은 속으로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조선인? 그리고… 발소리만 듣고 이들의 숫자를 파악했다고…?'


 이어지는 여자의 속삭임은 낮으면서도 단호했다.
 “지금 죽고 싶어요? 당장 총에서 손 떼고 제 허리를 안으세요.”


 무열은 급히 총에서 손을 떼고, 어색하게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여자는 그의 손을 바짝 끌어당기며 몸을 밀착시켰다.

 “설마… 여자를 안아보는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겠죠?”


 귓가로 스며드는 그녀의 장난 섞인 속삭임에 무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그의 가슴에서 단단한 무언가를 느꼈다.


 “폭탄도 품고 계시네요? 혹시 의열단 소속인가요?”


 무열의 눈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어떻게 알았…”


 그러나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뒤에서 순사들의 조롱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なんだよ、恋人がいたのか? (뭐야, 애인이 있었던 거야?)”


 무열의 품에 안긴 그녀가 그의 팔을 더욱 단단히 고정한 채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佐藤さん、ちゃんと言ったでしょ? 私、既婚者なんだから。 (사토 씨,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저, 남편 있는 여자라고요.)”


 “なに? (뭐라고?)”

 사토라 불린 순사가 얼굴을 굳히며 무언가 더 말하려는 순간, 모퉁이 반대편에서 또 다른 무리의 발소리가 뚜렷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모습을 드러낸 회색 제복의 순사들.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임을 확인한 사토가 먼저 짧게 목례를 했다.


 경무국 순사들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곧 가볍게 목례로 답했다.


 그때,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부하들을 꾸짖듯 외쳤다.
 “おい、どういうことだ? こっちに逃げたって言っただろ! (이게 뭐야? 이쪽으로 도망갔다고 했잖아!)”


 “そ、その… す、すみません! (그, 그게… 죄, 죄송합니다.)”
 나머지 순사들이 잔뜩 주눅 든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런 멍청한 새끼들!”


 광기에 찬 그의 조선어가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 무열의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이 목소리는… 최도윤? 네가 왜 여기에…?'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훈련 동기였다.
 '2년 전 작전 실패로 의열단 특공 4조가 모두 잡혀 죽은 줄 알았는데, 설마…'


그때, 도윤의 고개가 무열과 의문의 여인을 향했다.
 “뭐야, 이 연놈들은?”


 위험을 직감한 무열은 얼굴을 들킬 것 같은 위기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품에 안긴 그녀에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그리고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으읍—!”

 여자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다행히 다른 저항은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경찰청 순사 하나가 비웃듯 내뱉었다.
 “ふん、やることがまるでチョウセンジンだな。 (하는 짓이 딱 조센징이구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도윤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조롱의 화살은 무열을 향했지만, 이미 분노로 치밀어 오른 그의 머리는 더 이상 생각할 공간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낮게 쏘아붙였다.
“今の言葉…俺に言ったのか? (지금… 나한테 한 말인가?)”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