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부터 글쓰기 속도는 내 자랑이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이 손끝을 시작으로 펜을 통해 종이로 쏟아져 나오는 순간의 쾌감이란, 막혔던 변기가 시원하게 뚫리고, 40도의 무더위에 살얼음이 낀 맥주가 목구멍을 시원하게 타고 내려가는 짜릿함이었다.
원고지 스무 장쯤은 반나절이면 충분했고, 완성된 글을 바라보며 혼자 뿌듯해하곤 했다.
“이 정도면 작가 못지않은데?”
그렇게 우물 속 작은 개구리로 살던 어느 날, 웹소설 작가에 도전하겠다는 구실로 며칠 공들여 쓴 소설 초고를 아내에게 건넸다.
그녀는 평소보다 오래 읽었다. 나는 그것을 좋은 신호로 받아들였다. 집중해서 읽고 있구나, 몰입하고 있구나, 재미있구나.
그러나 그것 또한 착각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은 아내의 표정은 예상과 달랐다.
“너무 뻔해.”
단 네 글자. 아내가 나를 위해 좀 더 오래 읽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긴 말로 긴 상처를 주기보다 가장 짧은 한 마디로 딱 필요한 흔적만 남긴 그녀의 마음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많이 아팠다. 변명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아내는 평소 내가 읽던 책들을 함께 읽어온 사람이었고,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서운했다. 며칠 밤을 새워 쓴 글인데, 겨우 그 한마디로 끝이라니.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의 무게가 점점 스며들었다. 내가 빨리 쓸 수 있다고 자부했던 것들을 하나씩 되짚어보니, 정말 뻔한 것들이었다.
주인공의 성격은 어디서나 봤을 법한 전형이었고, 갈등 구조는 예측 가능했으며, 결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빨리 써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안전한 길로만 이끌고 있었던 것이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시간도, 깊이 있게 성찰할 여유도 없이.
우연히 '웹소설 작가로 생존하는 법'이란 제목으로 누군가 블로그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그분은 소설이 꼭 성공하지 않더라도 하루에 세 편씩 써서 한 편당 월 50만 원 벌어도 150만 원이니 괜찮은 수익 아니냐고 말하길래, 유난히 깊게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순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의 말이 온전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빠름을 내려놓은 자리에 천천히 새겨진 문장 하나가 산처럼 무겁게 쌓일 때 빚이 아닌 빛으로 값진 수확이 가능함을.
쓰디쓴 충격을 달래려 마신 커피는 더욱 쓴 맛으로 깊어질 뿐이었다. 할 수 없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전략으로 방향을 바꾸고 창가 옆에 앉아 있다가 영화 '내부자들'에서 백윤식 배우가 말했던 대사를 떠올렸다.
"끝에 단어 세 개만 바꿉시다. '볼 수 있다'가 아니라 '매우 보여진다'로."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별것 아닌 대사라고 생각했다. '볼 수 있다'와 '매우 보여진다'가 뭐 그리 다르다고. 하지만 아내의 지적을 받은 후, 그 차이가 선명하게 보였다.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독자에게 여지를 남겨둔다. 하지만 '매우 보여진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강한 인상을 각인시킨다. 똑같은 내용이지만 전달하는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진다.
작가는 이런 선택을 수백 번, 수천 번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글의 톤을 결정하고, 문장의 리듬을 만들고, 독자의 감정을 좌우한다는 그 간단한 이치를 말이다.
다음 날부터 나는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빠르게 쓰지 않고, 한 문장 한 문장 신중하게 써보기로 했다.
첫 문장을 쓰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평범한 문장이었다. 다시 써봤다.
"새벽의 마지막 어둠을 밀어내며 햇살이 스며들었다."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두 시간을 더 고민한 끝에 이런 문장이 나왔다.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먼지들을 춤추게 했다."
애써 붙잡은 문장은 살아 있지 않았다. 억지로 빚어낸 만큼 흉물스러웠고, 결국 나는 완벽한 문장을 얻는 데 실패했다.
예전에는 연재가 늦는 작가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터넷 서점 댓글창에 "언제 나와요?", "너무 늦어요"라는 독자들의 항의를 보며, 마음속으로 동조하기도 했다. 작가라면 정해진 시간에 글을 써내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제야 조금 알겠더라. 그들이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이며 보냈을지를. 한 장면을 살리기 위해 수십 번도 넘게 고쳐 썼을 것이고, 등장인물의 한마디 대사 때문에 몇 날 며칠을 고민했을 것이었다.
책을 고르는 손길마저 늦어진 어느 날, 박완서의 수필이 내 앞에 놓였다.
"나는 '아름답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 한다. 그 말이 너무 흔해져서 진짜 아름다운 것을 만났을 때 쓸 말이 없어질까 봐서."
그 순간 나는 떨림 속에 잠겼다. 이것이 진짜 작가의 마음가짐이구나. 단어 하나도 귀하게 여기고, 그 의미를 소중히 다루는 자세가 바로 이거구나.
나는 그때부터 내가 자주 쓰는 단어들을 점검해 보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아주' 같은 부사들을 남발하고 있었고, '했다'로 끝나는 문장들이 너무 많았다. 감정을 표현할 때도 '기뻤다', '슬펐다' 같은 직접적인 단어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6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느리게 쓰고 있다. 그리고 그 느림 속에서 발견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호흡,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여백, 그리고 무엇보다 독자와 만나는 순간의 떨림. 빨리 쓸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다.
아직도 아직 갈 길이 멀다. 하루 종일 한 문장과 씨름하다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는 날도 있고, 며칠 동안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날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아니, 그냥 조금 덜 속상하다. 천천히 쓰는 법이 아직 어색해 속상함마저도 어설프게 줄어든 모양이다.
요즘 나는 산책을 자주 한다. 천천히 걸으며 길가의 꽃과 나무를 보는 재미를 즐기려 노력한다. 빨리 쓰지 않고 한 문장, 한 단어, 한 음절의 무게를 느끼며 연습하는 글쓰기처럼 말이다.
나는 여전히 서툴다. 하지만 한 문장의 무게를 아는 순간부터 글쓰기는 더 이상 속도 경쟁이 아닌 깊이의 여행이 되었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나는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오늘 내 아내에게 새로 완성지은 글을 보여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