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말투는 친절했다.
그래서 더 차가웠다.
나는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봤다.
얇고, 하얗고, 구겨지지 않은 한 장. 15년의 시간이 그 안에 적혀 있었다.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다.가느다랗고, 거의 느껴지지 않는 빗줄기.
그것이 종이에 스며드는 걸 보며 잠깐 멍해졌다.
그 한 장이 내 인생의 챕터를 닫고 있었다.
건물을 나서면서 생각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기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의 끝인 줄 알았는데.
가벼움 속엔 두려움도, 미련도, 그리고 아주 작게 이상한 자유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천천히 숨을 쉬었다.
다음 날,
6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자명종도 없었고, 출근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감각이 그제야, 서서히 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소리 없이, 오래.
그건 오래된 감정이었다.
회사 복도 끝에서 돌아섰던 순간들, 야근 후 불 꺼진 거실에서 멈칫했던 밤들.
그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 같았다.
며칠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일정도, 목적도 없었다.
커피는 뜨거웠고, 햇살은 커튼 사이로 조용히 들어왔다.
창밖에서 아이들이 등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나를 조금 살렸다.
거울 앞에 섰다.
출근하던 시절의 표정은 사라지고 조금 낯선 얼굴이 있었다.
자유라는 이름의 표정.
아직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 얼굴이 나쁘지는 않았다.
인생이 끝난 줄 알았지만 그날부터 이상하게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조용한 퇴장이었지만,
느린 입장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