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미안해’는 설명이 없었다.. 그의 ‘미안해’는 설명이 없었다
그날 아침, 커피를 마셨다.
쓴 맛은 평소보다 조금 더 또렷했다.
창밖에는 맑은 빛이 들었고, 신호등은 어김없이 바뀌었다.
출근길은 조용했다.
이어폰에선 빌 에반스가 흘러나왔고, 나는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러다 전화가 왔다.
"미안해."
짧은 말이었다. 어떤 설명도, 감정도, 망설임도 붙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익숙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했다.
나는 25년 동안 그를 친구라고 생각해왔다.
그 믿음 위에 돈을 얹었고,
그 돈 위에 삶의 한 조각을 올려놨다.
이제 그 조각은 없다.
조각은 사라지기보다
부서지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게, 조용하게 무너졌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포장마차는 여전히 떡볶이 냄새를 풍겼고, 자동차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망설임 없이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음악을 흥얼거렸다.
나는 멈춰 있었지만, 세상은 흘렀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음식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고, 창밖을 본 적도 없었다.
음악은 흘러나왔지만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확히 뭐가 끝났는지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런 기분이었다.
어느 날,
낡은 운동화를 꺼냈다.
기억보다 단단했고, 생각보다 낡아 있었다.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공원을 지나고, 익숙한 가로수길을 지나, 낯선 거리로 접어들었다.
걷는 동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그렇게 걷는 시간이 쌓였다.
비질 소리, 고양이 울음, 벽에 비친 그림자.
말 없는 것들이
조금씩 나를 꺼내주었다.
서랍을 열었다.
접힌 서류들, 오래된 영수증, 시간이 식은 숫자들.
한 장씩 찢었다.
종이 찢어지는 소리는 조금 위안이 되었다.
다시 카페에 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사람들 웃는 소리를 들었다.
별일 아닌 대화가 내 귀를 스쳐갔다.
그 안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는 상태로.
그건 의외로 괜찮은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상처는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그 상처를 기억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어느 날, 그가 좋아하던 음악을 틀고 비 오는 거리를 걸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되는 날이 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거니까.
삶은 가끔,
우산 없이 맞이한 봄비처럼 스며든다. 예상치 못한 젖음이, 오히려 나를 깨운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