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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서기 Aug 19. 2021

호떡 파는 아줌마


    

20 여년 전 우리 집에도 I. M. F 때보다 더 힘든 불경기의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었다. 한참 돈 들어갈 무렵에 어려움이 생기다 보니 막막하기만 했다. 결혼 이후 남편은 한 번도 일을 쉬어본 적이 없을 만큼 생활력이 강했지만 워낙 경기가 좋지 못한지라 우리 집에도 그 태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남편이 너무나 괴로워하고 있던 차에 친정어머니의 소개로 호떡장사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노점 장사였다.


한 달을 고민 고민하는 가운데 노점 장사야 말로 빠른 시간 안에 돈을 모을 수 있다는 말에 체면 걷어붙이고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며칠 발품을 판 덕분에 적당한 자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다음날부터 당장 일을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그 자리에 노점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참, 다행이다 싶은 생각도 들었고 하늘이 돕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까지 둘 정도로 호떡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루에 40kg 파는 것은 보통이었고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두 딸과 함께 코 묻은 돈 세는 재미에 푹 빠져 있을 즈음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노점이 하나 둘 생기더니 호떡집이 두 군데가 더 생기기 시작했다. 길 건너에 계란빵 파는 차, 과일 차, 닭 파는 차, 붕어빵 노점이 생기는 바람에 손님의 입맛이 분산이 되어 매출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 버렸다.

얼마 동안은 단골손님에 의해서 겨우 유지가 되었으나 하루가 멀다 하고 길 건너 호떡 파는 부부가 와서 날마다 방해를 하는 바람에 그마저도 힘들어졌다. 급기야는 자전거를 리어카 앞에다 가리고는 오는 손님들을 못 오게 막는 것이었다. 참다못해 큰 소리를 내고 싸우다가 남편을 부르게 되었다. 남편은 의를 보면 참지않는 성격이지만 이날은 큰소리 내기보다 좋은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서 좋게 합의를 보았다.     


  다음 날 일을 하려고 장소에 나가보니 자리에 있어야 할 리어카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오전 일찍 단속이 왔었는데 내 것만 끌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망연자실 서있자 붕어빵 사장님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이봐 호떡, 아마 저 옆에 있던 호떡집에서 신고를 했을 거야. 다른 곳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거든. 우리나라는 이런 것이 문젠데 말이야. 다른 사람이 좀 잘된다 싶으면 경쟁이 붙어서 남까지 못살게 는 근성이 있어. 결국은 자신도 못하면서 말이지." 


마음이 씁쓸해졌다. 어쨌든 조금 일찍 나왔어도 지키고 있다가 잠시 피하면 됐는데 늦게 나온 바람에 미쳐 시간을 놓쳐버린 것이다. 너무나 화도 났고 급기야는 대통령이 원망이 되었다. 없는 사람 먹고살게나 두지, 대책도 없는 서민들은 어떻게 살라고 그러는지 참 알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던 차에 딸아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 실은 내가 학생과장님에게 교 앞에서 엄마가 호떡 팔 수 있게 해달라고 허락을 받았는데 당장 그쪽으로 가자. 점심시간에 잠깐 나와서 엄마 파는 것도 도울 수도 있고 저녁에 야자 시간 전에 도울 수도 있고 공부 끝나고 같이 들어가면 되는데 엄마가 여기서 이런 수모당하는 것 도저히 못 보겠어. 제발 가자 엄마. 이곳 미련 버리고…. 응? 단골이야 다시 만들면 되지.”


울면서 매달리는 딸아이를 보면서 가슴이 찡해왔다.

큰아이는 점심시간에도 엄마 고생한다고 교복 입은 채로 와서 호떡 굽는 일을 하고 전혀 부끄러운 것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내게 너무나 큰 힘이 되어주었다.  

   

“교문 앞에 가면 네 친구들도 있고 부끄럽지 않겠니? 아무래도 그건 좀 그렇다”라고 말하자 아이가 오히려 큰소리로 내게 말했다.


“참내, 호떡이 어때서…. 난 아무렇지도 않고 수능 끝나면 내가 할 거야. 학비도 벌고 엄마 호강도 시켜주고 그럴 거니까 조금만 고생해 엄마. 아빠 일도 곧 풀리겠지.”


아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천하를 얻은 것 같은 마음이 들었고 열 아들 부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굉장히 놀라면서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마구 자랑을 늘어놓았다.

  비록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인성은 어느 누구보다 훌륭히 잘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오래전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만두 찐빵 장사를 하셔서 사 남매를 키우셨고 집안을 일으키신 어머니는 틈만 나면 졸기 바빴다.

엉덩이만 땅에 붙이면 병든 닭처럼 스르르 잠에 빠져드시는 어머니가 그때는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다. 당시 호떡을 시작하면서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엄마, 대를 이어서 빵 장사하게 됐네. 웃기지? 이참에 만두도 팔까?"


  힘든 내색하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말을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호떡장사를 하면서 친정어머니 생각이 얼마나 많이 나는지….


아, 이래서 졸 수밖에 없었구나. 얼마나 힘들었을 까, 불쌍한 엄마….’


  일을 하다 보면 열 시간 넘게 서 있을 때가 많았는데 저녁이면 발가락이 감각이 없었고 다리 전체가 쑤셔오기 일쑤였다. 호떡을 구우면서 엄마 생각으로 눈물이 앞을 가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편하게 살았는지 남편에게 그런 말을 했다.


“여보, 당신 지금까지 우리 먹여 살리느라고 고생 많이 했는데 당분간은 생활비는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가있어. 몸도 약한 사람이….”


 학교 앞에서 장사를 하려는 계획이 교장선생님의 반대로 불발에 그치면서 다른 자리를 찾아보았으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삼 개월 정도 지나 남편의 일이 회복되었고 노점을 그만두었다. 나 역시 그 이듬해부터 신문사에서 일을 시작했고 일 년이 지나 출판사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때의 일은 내 인생에서 결코 지울 수 없었던 사건이다. 노점이라는 밑바닥의 삶을 통해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큰 인생의 공부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서민들의 삶의 애환들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기에 나름대로 많이 감사할 수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가 이기적이고 때로는 쓰레기 근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빈부의 귀천, 직업의 귀천, 학벌의 귀천을 따지는 요즘 사람들이 바로 쓰레기 같은 근성을 가진 사람은 아닌지…. 노점을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 역시 그런 삶이 최고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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