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번 이력서를 썼던 선배가.
회사에 첫 출근을 하던 날을 떠올려본다. 막바지 늦더위가 한창인 9월이었다. 출근길에 햇살이 뜨겁게 느껴졌었다.
면접을 보았던 분을 따라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뒤, 첫날의 업무를 받았다. 해외 고객에게 보내는레터 초안을 작성하는 - 지금 생각해 보면 간단한 - 일이었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 외국어로 비즈니스 레터를 써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좋아하던 학창 시절의 내가 미래에 해외 영업을 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번역 일을 할 거라고 줄곧 믿고 있었다. 그래서 문학 공부를 그만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막막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외국어라서, 막연하게 해외 관련 업무를 하고 비행기를 타는 일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취업 준비생들에게 조언을 구하니 취업할 때까지 이력서를 50번은 써야 한다고 했다. 전공과 취업 시기를 고려한다면, 난 이력서 100번 써야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하지만 30개의 이력서를 쓰는 동안 면접을 볼 기회도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맞을까, 매일 기대와 좌절,절망과 희망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래도 당장 할 일이 없으니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 이력서 하나를 쓰고, 책 한 권 또는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을 목표로 했다.
드디어 50번째 이력서를 썼을 때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면접을 보신 분은 해외입찰서와 기술 제안서를 번역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했고, 당장 다음 달부터 출근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LS ELECTRIC 시스템 해외 영업 번역 계약직으로 해외 영업 커리어를 시작했다.
취업하기 전에는 취업만 하면 모든 걸 다 해내고, 모든 게 다 해결될 것처럼 생각되었다. 실제로 책상 앞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해외 고객들과 만나 미팅하고, 제안을 위해 협의하는 상황은 새롭고 재밌었다. 기회가 절실했던 만큼 일을 가리지 않고 했기 때문에 하루하루 다채로운 모험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처음 맡은 일들이 어려운 건 어쩌면 당연했고, 의욕적으로 일을 더 하겠다고 하고 해치우지 못해 제풀에 지친 때도 있었다. 몇 번 해봐서 익숙하게 일을 좀 할 수 있겠다 싶으면, 금방 더 어려운 일이 주어졌다. 회사에서는 혼자 하는 일보다 여러 사람들과 같이하는 일이 많기에, 인간관계도 신경이 쓰였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과 항상 잘 지내는 건, 여러 일 중에도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어떤 일들은 너무 익숙해져서 신기할 정도다. 해외 출장만 해도 그렇다. 첫 해외 출장은 비행기 시간을 몇 번씩 확인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항에 갔다. 요즘은 외국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 오늘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할 정도로 출장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가끔은 일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수주와 매출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성취감을 느끼고 또 이렇게 고민하고 있나 싶다. 그래도 입사 후 오늘까지를 생각해 보면,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고, 기적처럼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했다.
언제부터인가. 해외 프로젝트를 하며 자신의 한계와 마주할 때면, 수첩을 꺼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을 적었다. 그리고 중요한 미팅이나 입찰을 앞두었을 때, 수첩의 메모를 읽으며 지금 잊고있는 게 없는지를 점검하는 습관이 생겼다.
[해외영업사원의 덕목]
0. 용기와 자신감
1.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2. 전체를 보는 눈을 갖는다.
3. 고객과 지속적 네트워킹. 고객의 이슈와 니즈를 파악하고 신속하게 대응.
4. 현지 파트너 확보, 역량 수시로 점검 : 재무 상태, 실적, 영업력, 실무자/팀 역량 등.
5. 팀워크 :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같이 하면 답이 나온다.
6. 제품: 코어는 우리가 가져야 한다.
7. 기술/트렌드: 경쟁사 대비 장점, 차별화 노력.
8. 수행 : 이해관계자 의사소통, 신뢰.
9. 견적/제안 : 과업을 철저히 이해하고, R & R을 나눈다. Grey Area가 없도록 하자.
10. 인정받는 것에 신경 쓰지 말자. 나는 그냥 나다. 기본을 잊지 말자.
11.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12. 준비가 없으면 패배뿐, 다양한 변수를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자.
13. 편법으로 얼렁뚱땅 넘길 생각하지 말자.
14. 상황에 맞는 유연한 대처, 지혜를 구하자.
15. 숫자, 특히, ‘환’에 대한 감각을 키우자.
16. 프로젝트를 이끌어 갈 때는 큰 줄기, 방향성을 공유하자.
오늘은 출근길에 처음 출근하던 날을 떠올렸다. 오늘이 입사지원서를 쓰던 그때보다 수월한가 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50번 실패 끝에 주어진 기회로 나는 그때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좋은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만났고, 업무 원칙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해외 시스템 영업을 하는 매니저로 성장할 수 있었다.
미래는 여전히 알 수 없고, 상황과 사람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걱정하고 불안해한다고 바뀌는 것 없다. 그래서 오늘 나는 그때와 같이 선택하기로 한다. 생각만 하지 말고, 말만 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하루의 목표를 세우고, 생각나는 대로 적고, 하는 데까지 해본다.
LS ELECTRIC 입사지원서를 쓰는 취업 준비생인 당신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얼마나 설레고, 또 얼마나 두려울지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입사지원서를 쓰는 이 도전의 시간이 어렵고 힘들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렇게 이력서를 쓰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모습의 자신을 상상해보는 날들도 곧 지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꿈꿔온 모습이 아니더라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이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자신이 지금의 수고와 노력을 알고 있을 것이다. 먼저 입사지원서를 썼던 나는 서투르지만 용기 있고, 또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비범하게 도전하는 당신을 응원한다. 그리고 그런 당신이 LS ELECTRIC에 입사하여 함께 일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