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수소 에너지의 역할
전쟁의 발발과 글로벌 인플레이션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특별 군사작전 개시’로부터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9개월에 접어드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의 일방적 침공에 맞서 많은 서방국가들이 구호물자와 군사 장비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고 있고, 이와 동시에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제재조치를 시행했다.
- 국제 결제망 퇴출, 러-유럽 연결 천연가스 해저 파이프라인 건설 사업(노르트스트림2) 취소
- 러시아 은행 보유 외환 및 푸틴 체제 주요 인사들의 국외 자산 동결
- 항공우주·반도체 등에 활용될 수 있는 첨단 부품의 공급 차단
- 러시아 국적 항공기 및 선박에 대한 영공 및 영해 출입 금지 등
이러한 제재조치들은 유가와 천연가스를 비롯한 원자잿값 폭등이라는 나비효과로 이어졌고, 석유와 천연가스의 상당 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던 유럽 국가들은 2022년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서방국가들이 주도한 대 러시아 경제제재가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의 경제까지 무너뜨리게 된 상황이다.
자원전쟁, 에너지는 무기, ‘밸브 잠가라’ 카드를 만지는 러시아
열/난방 에너지로 주로 활용하는 천연가스의 경우 EU 회원국가의 40% 이상이 전량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논리와 이해로 인해 현재까지는 다양한 공급관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유럽의 각 국가로 천연가스가 공급이 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전쟁의 흐름을 따라 언제라도 가스 공급을 끊는, 일명 ‘밸브 잠가라’를 선택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미 지난 8월, 러시아는 독일로 향하는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을 시설 정비를 이유로 중단 했었는데 정비 완료 개시일이었던 9월 3일 이전에 무기한 운영 정지를 발표하며 또 한 번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을 출렁이게 한 전력이 있다.
노르트스트림1 이외에도 많은 가스관들이 여러 국가들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방국가들의 제재 속에서도 러시아가 유럽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큰 무기가 되고 있다.
신 냉전의 시대, 총성 없는 "에너지 전쟁"
전 세계적 인플레이션 속에서 과거 이념 전쟁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국가 VS 사회주의 국가 냉전 구도와는 다른 새로운 국제질서의 흐름이 떠오르고 있다.
바로 에너지자원을 무기로 하는 에너지 공급국과 반대로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에너지 수요국의 합종연횡(合縱連橫)이다.
대표적인 에너지 공급국 진영은 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란, 쿠웨이트, 베네수엘라 등 총 13개국), 그리고 비OPEC 산유국 10여 개 국가를 포괄하는 OPEC+가 있다.
OPEC 국가들만으로도 이미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며, OPEC+로 확대한다면 매장량의 90%를 차지하게 되는데 러시아는 바로 이 OPEC+의 핵심 구성국이고, 이들 에너지 공급 카르텔이 석유 공급량을 감산/증산함에 따라 에너지 가격은 쉽게 출렁이게 된다.
OPEC의 창립국가 중 핵심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서방국가들과 가까운, 전통적인 미국의 우방국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의 행보는 국제사회의 제재에 힘들어하는 러시아의 손을 잡아주는 모양새다.
특히, 미국 정부의 감산 발표 연기요청에도 불구하고, OPEC+는 지난 10월 6일 하루 원유 생산량을 200만 배럴 줄이기로 결정했다는 발표를 알렸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는 백악관의 통화요청은 거부하고, 러시아와는 통화한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바이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현 민주당 정권 입장에서는 민심을 얻기 위해 선거 전까지 전력을 다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만, 빈 살만 왕세자는 미국의 요청을 대차게 거절하고, 오히려 미국에 정치적인 공격을 가한 셈이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가 전통적인 파트너쉽 국가인 미국과의 갈등을 이렇게까지 키우면서, 서방국가들의 적으로 인식되는 러시아와 협동하여 유가를 통제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자국의 이익이 최우선시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특히, 현 사우디 왕정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네옴시티와 같은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는 국가사업에 많은 국가들과 자본의 협조가 필요하다.
* 네옴시티(NEOM) :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비전 2030 정책의 일환으로 발표한 신도시 계획이다.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약 1조 달러(한화 약 1,300조원)을 사용해 서울의 43배 크기에 달하는 지역 내에 신도시를 지을 계획이다. 하지만, 친환경 도시를 컨셉으로 잡았기에 대부분은 자연환경 그대로 유지되며, 도시로 개발되는 지역은 극히 일부 지역으로 한정된다. 주요 프로젝트로는 아까바 만에서 네옴 국제공항까지 170km 구간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친환경 수직도시 건설 PJT **더 라인(The Line), 산악 관광지 및 2029년 동계 아시안게임 개최지 개발 PJT 트로제나(Trojena/트로예나, 트로헤나) 그리고 미래형 수상 복합 산업단지 개발 PJT 옥사곤(Oxagon) 등이 있다.
이러한 예산을 확보하고 협조를 얻으려면, 현재의 고유가를 유지하면서 자본을 쌓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와의 정치적인 힘겨루기가 가능한 카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계산이 바탕에 깔린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에너지 수요국가 진영의 대표적인 국가로는 우리나라와 같이 원유가 거의 매장되어 있지 않거나, 생산량이 소비량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라들일 것이다. 일부 국가는 생산량을 통제하면서 어느 정도 국제유가의 출렁임에 대응할 수 있기에 '스윙 프로듀서'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자국의 생산량만으로는 소비를 따라갈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에는 변함이 없다.
이에 에너지 수요국가 진영은 에너지 공급국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서로 연합하고 있다. G7과 EU는 러시아산 원유의 가격상한제에 대해 큰 틀에서 합의하였으며, EU 국가들 간의 세부 합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른바 ‘공동구매’를 통해, 장기화된 전쟁으로 인한 재정 부담을 안고 있는 러시아로부터 안정된 가격으로 천연가스를 공급받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겠다는 전략이다.
장기화 된 코로나19와, 그 이후 일상 회복단계에서 폭발한 자산 가격 폭등, 원자재 부족,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폭등 등 여러 요인들이 겹쳐 2022년 가을 현재 전 세계는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고통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전 세계를 에너지를 기준으로 진영을 나누게 되는, 총성 없는 ‘신 에너지 전쟁’ 구도로 재편되었다.
에너지 자립의 필요성, 그 중심에 선 '수소에너지'
이러한 흐름으로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에너지 의존에서 벗어난 에너지 자립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유럽연합 집행위는 러시아 에너지 의존 중단 및 친환경 전환 가속화를 위한 'REPowerEU' 계획을 지난 5월 발표하였다.
REPowerEU는 현재 40%에 달하는 대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도를 2022년 말까지 3분의 2 수준으로 감축하고 늦어도 2030년까지 ‘0’ 수준을 달성하는데 목표가 있다. 또한 2030년까지 석유, 석탄 등 기타 화석연료에서도 러시아산 화석연료 비중을 큰 폭으로 감축시키고자 하고 있으며, 핵심 계획은 아래와 같다.
첫째, 에너지 소비 절감.
유럽연합 에너지효율지침에 따른 2030년 에너지 소비 9% 감축 의무를 13%로 확대하고, 단기적으로 소비자의 에너지 절약을 통해 에너지 소비를 5% 절감한다.
둘째,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
미국, 카타르, 이집트, 아제르바이잔, 터키, 서아프리카 지역 등으로 천연가스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이를 위한 역내 LNG 터미널 등의 기반 시설을 증설한다.
글로벌 친환경 에너지 전환 지원, 신재생에너지 및 수소 보급 확대, 에너지 외교 역량 강화 등을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와 관련한 우선 정책으로 추진한다.
셋째, 친환경 에너지 보급 확대.
재생에너지 인・허가 절차를 단순화해서 빠른 재생에너지 보급이 가능하도록 하고 설비증대 목표로 2030년까지 80GW의 추가용량 증설, 풍력 및 태양열의 평균 설치율 20% 증가 등을 제시한다.
하지만 에너지 소비 절감 방안은 참여국의 실사용자인 각국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방법이고, 공급망 다변화 또한 시설 확대에 필요한 LNG 유조선 수요를 조선사들의 생산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REPowerEU 세 가지 핵심 계획 중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이 가장 핵심으로 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태양광과 풍력으로 대표되는 재생에너지 전력은 연속적이지 않고, 전력 자체의 저장/전송에도 한계가 있어 새로운 에너지 저장 운송체가 필요한데, 이 때 수소가 등장한다.
수소는 동일 질량 당 액화탄화수소 대비 3배의 열량을 지니며, 수소 저장시설은 동일한 체적을 기준으로 배터리 기반 ESS 대비 에너지 저장 용량 및 저장 기간이 길어 전력 에너지의 형태를 변환하여 저장하는데 더 효율적이고, 장거리 운송도 쉽게 가능하다. 그래서 현재 EU에서 진행되고 있는 태양광/풍력 프로젝트들 중 일부는 수소 생산 프로젝트와 함께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수소 생산 시장이 대폭 성장할 전망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러한 수소 산업 확대를 위해 2030년까지 EU 역내 1천만 톤의 수소 생산역량 및 추가 1천만 톤의 수소 수입원을 확보하여 운송 섹터 등 탈탄소화가 어려운 산업 섹터의 친환경 전환을 지원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집행위는 친환경 수소의 정의 및 생산과 관련한 2개의 이행 입법을 발표할 예정이며, 수소 프로젝트 지원을 위해 추가적으로 2억 유로를 연구개발에 투입할 것이다.
유럽뿐만이 아니다. 미국 또한 수소에너지 관련 지원을 대폭 확대하였는데. 지난 8월 서명한 IRA 법안에 따라 블루수소 생산에 탄소 포집(Carbon Capture) 활동에 대해 세액공제를 강화하고, 시설의 규모와 처리 방법에 따라 차등이 있으나, 탄소 포집&영구 저장(Carbon Capture & Storage)의 경우 1톤당 최대 $85, DAC(Direct Air Capture)방식을 통한 CCS는 1톤당 최대 $180의 혜택을 주기로 하였다. 또한, 수소 생산에 있어서도 이산화탄소 집약도(CO2e)에 따라 생산된 청정수소 1kg당 최대 $3의 세액공제를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에너지 자립과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소에너지. 아직은 극복해야 할 기술적 문제도 남아있고,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투자와 산업군의 확대가 필요하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이 ‘수소에너지’는 천연자원이 부족한 에너지 소비국의 에너지 독립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