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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스윽 Oct 22. 2022

꿀벌들의 전쟁

전지적 기간제 시점

수능이 끝나는 11월쯤 되면 교사들은 끼리끼리 모여 수군대기 시작한다.

내년에 근무할 자신의 부서와 업무, 다른 교사의 부서와 업무를 서로 맞추어 보며 이야기를 한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본 학교 업무분장에 관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 꿀벌 간의 전쟁이다.

'꿀 빤다'는 말을 아는가? 군대에서 처음 들었는데 편히 쉬고 있는 상태를 꿀빤다라고 표현했다.

내년에 업무가 많이 없는 꿀 부서를 얻기 위해 전년도 11월부터 부단히 노력하는 교사들이 많다.


이제는 경력이 되었으니 나도 원로교사로 우대 좀 받아야지,라고 말하는 나이 지긋하신 교사.

올해 부장 업무로 고생했으니 내년엔 좀 쉬어야지요,라고 말하는 중견 교사.

아직 업무를 잘 몰라 부장급 업무는 못 합니다,라고 말하는 신입 교사.


진취적으로 앞장서서 일을 하고자 하는 교사는 많이 없다.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개인적인 이유만 있는 교사는 많다.


올해는 우리 애 대학 가야지, 아줌마 교사.

공부하려고 대학원 다녀요, 젊은 교사.

난임 휴직 들어갈 겁니다, 예비 엄마 교사.


개인적인 미래, 꿈을 꾸는 게 보기 싫은 것이 아니다. 일에 미쳐 워커홀릭으로 사는 것도 보기 좋지 않다. 그리고 누구나 일을 덜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맞다. 누가 일을 많이 하고 싶어 하겠는가. 단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들의 말도 안 되는 변명과 이기심이다. 학생들도 학급에서 1인 1 역할 나눌 때 안 하는 짓거리를 다 큰 교사들이 하고 있다.


기피 부서 업무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로 자기 어필만 하는 교사는 그래도 매너 있는 교사다. 내가 꿀을 빨기 위해선 누군가는 기피부서에서 일을 해야 한다. 기피부서에 가지 않기 위해 자기 어필뿐만 아니라 다른 교사에 대한 칭찬 혹은 추천이 들어간다.


아, A가 일을 진짜 잘하더라. 걔는 교무부나 학생부 데려다 놓으면 딱이야,라고 말하는 교사.


가만히 듣고 있으면 김성근, 김경문, 히딩크, 퍼거슨이 따로 없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 명장이 되어 최적의 포지션을 찾기 시작한다. 교무부장에 누구, 학생부장에 누구, 학년부에 누구. 학교폭력은 기간제 쓰고.


그저 다들 자기 자리 지키며 일하는 같은 꿀벌일 뿐인데 마치 이 학교를 운영하는 여왕벌이라도 된 마냥 다른 사람은 힘든 업무에 갖다 놓고 자신이 일을 덜 하는 행복한 미래를 망상하는 걸 보면서 처음엔 속으로 분노했다. 그러나 이제는 꿀벌끼리 서로 더 꿀 빨려고 아등바등 이간질하고 싸우는 모습이 안타깝고 이제는 지친다.


물론 모두 나와는 상관이 없는 먼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난 이런 대화가 나오면 멀리서 관찰자의 입장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내가 이 이야기에 참여하려면 전제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년에 이 학교에서 나의 계약이 연장되어야 한다.'


내년 나의 거취를 모르기에 저 대화에 참여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업무 분장은 그저 위에 계신 누군가가 설정한 대로 나는 배치될 뿐이다. 그리고 묵묵히 나의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나에겐 내년 나의 업무를 선택하거나 희망하는 권한이 없다. 물론 형식적으로 희망부서는 적어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희망부서일 뿐이다. 기간제 교사가 기다리는 건 그저 학교폭력, 생활지도 같은 정교사가 하기 싫어하는 기피부서의 업무들 뿐이다. 그래서 꿀벌들의 대화는 나에게 사치이자 배부른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오늘도 열심히 죽는소리를 하며 다른 사람을 치켜세우는 다른 교무실 L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선생님. 선생님도 같은 일벌이시면서 쉬는 시간마다 뭘 그렇게 내년도 업무분장을 열심히 하세요. 교장선생님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열심히 업무분장 안 하셔도 돼요. 다 교장, 교감 선생님이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어차피 선생님 내년 업무는 학생부 업무 안 하실 거잖아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세요. 보기 안쓰럽고 힘들어요. 제가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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