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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re Sep 25. 2020

내언니전지현과 나

게임 일랜시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서비스 20년이 넘어가는 넥슨의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 거기에는 아직 소수의 유저들이 남아있다. 길드원들과 일랜시아를 즐기던 감독은 망할 대로 망한 일랜시아가 나아질 수 있을까, 일랜시아에 남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남아있는 걸까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가지고 영화를 촬영한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한 게임은 Earthworm jim이라는 고전 횡스크롤 어드벤쳐 게임이었다. 아마 5-6살 정도에,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한 DOS라는 OS로 가동해 즐긴 게임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지금까지, 나는 엄청나게 많은 게임을 했다. 게임 한 시간과 종류로만 따지면, 나와 비슷한 나이대에선 최상위에 들 자신이 있을 정도로 많은 게임을 해왔다.


그 많은 게임 중에, 일랜시아는 내 마음 속에서 약간 특별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우리집은 어릴 적엔 게임에 돈 쓰는 걸 죄처럼 여겼기에, 당연히 정액제 같은 걸 끊을 순 없었다(당시 일랜시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온라인 RPG게임은 유료 정액제였다.). 그래서 나와 누나는 테스트 서버, 지금으로 치면 PBE 서버를 전전했다. 테스트 서버는 주기적으로 리셋하거나 밸런스가 불안정한 대신 무료였다.


우리는 그렇게 대략 2년 간 일랜시아를 했다. 키우다가 서버가 리셋돼서 캐릭터가 없어지면 다시 테스트 서버에 캐릭터를 만들어 처음부터 키우고, 그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거기서 나는 친구를 만들었고, 현실의 친구와 함께 게임을 하기도 했다. 몬스터를 잡고 악당과 싸우기만 하는 대부분의 게임과 달리 일랜시아에서는 많은 걸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친구와 즐기기 더 좋았다. 낚시, 연주, 채굴 등. 물론 모두 마우스나 키보드를 누르기만 하는 반복적인 행위였지만 게임 상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재미있게 느껴졌다.


하지만 얼마 후, 나는 일랜시아를 떠났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같이 오래 게임을 하던 현실 친구가 그만 두었고, 잦은 테스트 서버 리셋 때문에 게임 상의 친구들을 다시 찾기 어려웠으며, 새로운 게임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 나와 누나는 아스가르드라는 게임의 오픈 베타로 옮겨갔다.


그 뒤로 아스가르드가 유료가 되고, 다른 많은 게임을 했다. 몇년 후,넥슨은 일랜시아를 비롯한 네 게임(바람의 나라, 어둠의 전설, 아스가르드, 테일즈위버) 클래식 RPG로 지정하고 무료화를 선언했다. 하지만 다시 일랜시아를 하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영화에서도 말했듯,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재미있어 했던 건 게임 자체가 아니라 당시 친구들과 함께 놀던 추억, 기억, 경험들이었던 것 같다.


내언니전지현 캐릭터의 유저이자 영화 감독 박윤진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느끼고, 어느 부분에서 좋고 별로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영화에 담긴 감독의 의도나 생각도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내가 가장 영화에 감동한 부분은, 내 추억이 있는 곳을 지키려는 누군가가 아직 거기에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거의 20년 간 일랜시아에서 자리를 지켜온 유저들과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면 내 말에 콧방귀를 뀔지도 모른다. 어쨌건 나는 게임을 떠났고, 잠깐 2-3년 한 사람이 무슨 소리냐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영화를 본 내 감상은, 마치 재개발로 쓰러져가는 나의 고향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영화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 일랜시아는 정말 철저히 서자 취급 당한 게임이다. 홍보도 많이 하지 않았고 관리도 부실했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낮은 편이었다. 대부분 친구들은 게임을 하지 않거나 바람의 나라, 혹은 어둠의 전설을 많이 했고 이후에는 테일즈위버나 메이플스토리, 던파 같은 게임을 했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일랜시아 유저들 사이에는 무언가 묘한 감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연대의식이라고 하면 약간 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뭔가가 있다. 비주류 게임을 하던 사람들의 동질 의식인지도 모르겠다. 일랜시아를 알거나 해본 사람을 보면 반갑고 기쁘고 한 것이 분명히 있다.


일랜시아의 화면이 스크린에 담길 때, 그 망가진 현재의 모습을 볼 때, 그걸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때, 나는 왠지 모르게 슬프고 가슴이 미어졌다.

일랜시아 소개페이지

솔직히 지금 일랜시아를 다시 할 거냐고 물으면 나는 아니라고 답할 거다. 게임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어도 긴가민가 할텐데, 영화에 의하면 대부분의 유저가 매크로를 돌리며 하고 있고, 육성법에 정해진 루트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한다. 내가 대부분의 온라인 RPG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정석 육성법이 있기 때문이고, 일랜시아를 좋아한 것도 그런 것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지금 일랜시아를 내가 다시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일랜시아는 거기에 계속 남아 있었으면 한다. 지금은 일랜시아를 하지도 않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좀 이기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주말 새벽에 부모님 몰래 일어나 일랜시아를 하고, 게임 친구들과 만나서 인사하고, 방과 후에 학교 친구와 같이 게임에 접속해 아이스 푸푸를 잡았던 그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의 고향 같은 게임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면 한다.


영화 속 사람들은 분명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어째선지 그들을 보고 있자니 고향에 두고 온, 정말 친했던 친구를 보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정액제를 신청해 꾸준히 일랜시아를 해왔다면 나도 그들과 함께 아직까지 일랜시아를 즐기고 있을까하는 아무 의미 없는 생각도 들었다.


어쩐지 영화리뷰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넋두리가 된 감이 있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보고 한 생각은 이런 거니까. 영화에서는 IMF같은 시대적 문제나 청년실업 등 청춘의 문제를 일랜시아와 연계해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솔직히 별 생각도 관심도 크게 가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은 분명 거기에 더 의미를 부여했겠지만). 그저, 스크린에서 일랜시아와 그걸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어 좋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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