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어느 크리스마스, 젊은 기사 가웨인 경은 자신의 주군이자 삼촌인 국왕의 부름을 받아 왕의 파티에 참여한다. 국왕이 가웨인과 친해지고 싶다며 자랑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지만, 가웨인은 '저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그 순간, 괴인의 형태를 한 녹색의 기사가 파티에 난입하여 나와 맞설 자가 없느냐고 물으며, 자신이 어떤 공격을 받던 간에 1년 후 북쪽에 있는 녹색 예배당에서 그것과 똑같이 갚아줄 거라고 말한다. 이에 가웨인은 국왕의 검을 받고 나서 녹색 기사의 목을 베어버린다. 녹색의 기사는 잘려진 자신의 머리를 들고 미친듯이 웃으며 성을 빠져나가고, 시간은 흘러 이듬해가 되어 가웨인 경은 녹색 예배당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린 나이트>는 아서 왕 전설 중 하나인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 라는 전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그러나 영화는 기사도 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기사의 당당한 정신을 나타내기 보다는 인간적이며 비참하고, 더 나아가 비루하기까지 한 가웨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련을 앞두고도 아무 대비 없이 술을 마시며 놀기도 하고, 어린 강도들에게 포박당해 가진 것을 뺏기기도 하고, 죽음을 앞두고 제발 살려달라고 빌기도 하는 가웨인의 모습은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기사와 가깝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린 나이트>가 기사도 정신과 기사도 문학을 부정하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가웨인은 최후의 순간 직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쳤을 경우 자신의 미래를 환영처럼 보게 된다. 오랜 여자친구를 버리고, 전쟁에서 패하고, 아들이 죽고, 결국 자신의 목까지 떨어진다. 그런 미래를 본 가웨인은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을 죽음에서 지켜준다는 마법의 허리띠를 풀고 녹색 기사에게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종반부와 유사하다. 이 영화에서 예수는 최후의 십자가에서 '이제 더 이상 자신을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수호천사의 말을 듣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평범한 인간으로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되는데, 이 때 십자가에서 내려오도록 종용한 수호천사가 사실은 악마가 둔갑한 것을 깨닫고 절규한다. 절규 끝에 예수가 다시 눈을 뜬 곳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였다. 최후의 유혹을 이겨낸 예수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노라'를 외치며 죽는다.
비단 이 장면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혹은 예수의 일대기의 영향을 받은 느낌이 든다.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영화의 첫 대사나, 가웨인의 생김새, 기독교적 후광을 나타내는 듯한 왕관 등. 그러나 모티브나 결말은 그럴지언정 과정은 예수와 많이 다르다. 시작부터 어느 정도 완성된 인물이었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예수와 달리 가웨인은 부족하고 어린, 소년 같은 인간이다. 이런 모티브의 변용을 통해 감독은 메시아적이고 초월적인 인간보다는 소시민적인 인간의 성장을 보여주려 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맥락에서 가웨인이 차고 다니는 허리띠는 매우 중요한 소재다. 처음에는 어머니, 나중에는 잠시 몸을 맡긴 귀족의 부인에게 이 마법의 허리띠를 받는다는 점에서, 이는 안주하는 정신, 가정, 보호받고 싶어하는 욕구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가웨인은 명예를 이루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 걱정해 마법의 힘이 담겼다는 허리띠를 항상 차고 다닌다. 그러나 그는 허리띠를 맨 채로는 기사로서의 명예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허리띠를 풀고 운명을 맞는다. 이러한 가웨인의 행동은 도전하고 발전하려는 정신의 발현이다.
가웨인의 어머니 모건 르 페이(영화 상에서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의 행동은 영화 내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녹색 기사를 아들 가웨인에게 보낸 것이 그녀이고, 동시에 아들에게 목숨을 지켜주는 마법의 허리띠를 처음 건내준 것 역시 그녀다. 원전에서는 녹색 기사를 보낸 것 자체가 원탁의 기사를 시험하기 위함이었고 실제로 가웨인의 목을 치지는 않는 걸로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애매하게 끝나지만) 실제로 목을 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현실적 관점에서 보면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가웨인은 왕의 후계자이지만 아들이 아닌 조카다. 둘째, 셋째 아들도 아니고 서자도 아닌 조카는 당연히 왕위의 정통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어머니는 이를 기사로서의 명예로 대체하려고 한 듯하다. 기사로서 왕이 된 아서 왕의 후계자로서 그보다 그럴듯한 정통성은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아들에게 녹색 기사를 보내어 시련을 겪게 하고, 동시에 걱정되는 마음에 허리띠를 준 것이다. 허리띠를 차고 달성한 거짓된 명예일지언정 왕위 계승의 정당성은 확보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린 나이트>는 다양한 상징을 담고 있는 만큼 여러 갈래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포괄적인 정도의 해석을 내놓는 것은 아마 감독 본인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지닌 매력이 더 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도 감독이 넣은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 영화로서 높은 완성도를 보이기까지하니,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만난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