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nightWorks의 인디 비주얼 노벨 게임
어떤 사고를 당하고 이세계로 와버린 소년, 그리고 그런 그 앞에 유령을 자칭하며 나타난 소녀. 오직 소년의 눈에만 보이는 소녀는,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바로 자신이라는 존재를 사라지게 해달라는 것. 그걸 위해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를 조사하는 동안, 소년은 자신의 과거와 소녀의 죽음, 그리고 이세계의 비밀에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국산 게임, 국산 인디 게임에 대해서는, 믿음이 거의 없는 편이다. 이름은 언급 안하겠지만 자극적인 일러스트만 내세워 스토리나 다른 요소는 내팽겨처버린 게임들, 펀딩비나 투입 금액 대비 정말 말도 안되게 저열한 수준을 보여주는 게임들, 그런 게임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국산' 혹은 '인디' 라는 타이틀이 그들에게 어떤 면죄부를 쥐어준 것만 같다. 차라리 게임 제작 붐이 일기 전, 00년대 초중반까지 아마추어리즘이 지배했던 시기의 국산 인디 게임이 더 나은 퀄리티와 정성을 보였던 것 같다(물론 추억보정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와중에 1,1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접한 <여름의 끝에 피는 꽃>은 그런 내 인식을 조금이나마 변화시켜 주었다. 감각적인 연출, 준수한 더빙과 일러스트, 정성이 느껴지는 시나리오. 무료 혹은 천원 짜리 게임이라고 하기엔 과분할 정도의 정성이 게임에 넘치고 있다.
<여름의 끝에 피는 꽃>에 대해 가장 칭찬할 수 있는 건, 아마 연출 부문일 것이다. 제작사 스스로 '시네마틱 비주얼 노벨'을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이 게임의 연출은 상당히 영화적이다. 영화에서 짧은 장면을 몽타주 기법으로 배치하는 것처럼, <여름의 끝에 피는 꽃>은 다양한 스타일의 일러스트를 이야기와 병치하고 있다.
이는 마치 90년대 후반 가이낙스 애니메이션 연출이 생각나는 부분이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나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은 콘티, 혹은 단순한 장면들을 보여주면서도 그걸 시청자들에게 감각적으로 느껴지게끔 하는 데 성공했다. 스타일은 다소 다를 지라도 말이다.
때로는 수채화같은 일러스트, 때로는 PPT 발표와 같은 심플한 일러스트, 때로는 영화의 장면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그리고 때로는 사진 같은. 그런 다양한 일러스트를 보고 있자면 앞으로 어떤 연출을 볼 수 있을까하는 기대도 게임의 이야기와는 부차적으로 생기게 된다.
대충이나마 미숙한 글을 써 본적이 있어서인지, <여름의 끝에 피는 꽃>의 시나리오는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앞서 '정성이 느껴지는 시나리오' 라는 말을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군데군데 복선이 잘 배치되어 있고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 그리고 이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잘 혼합되어 완성도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인디 게임을 제작하며 이런 이야기를, 제작 일정에 맞추어가며 써내려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끝낸 이후에는 스토리가 다소 아쉽게 다가왔다. 간혹 고등학생인 현지가 말도 안되는 기계를 만들었다거나 하는 부분에서 현실성이나 개연성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던데, 개인적으론 그런 건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우선 이세계가 그렇게 주인공이 원하는 대로 편의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말을 통해 어느 정도 설명이 되기도 하고, 설사 설명이 안 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다. 저런 걸 문제라고 지적한다면 영화 <기생충>에서 수 년간 지하에 살던 사람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나, 고전 게임 <크로노 트리거>에서 루카가 말도 안 되는 기계를 뚝딱 뚝딱 만들어버리는 것도 문제가 된다. 스토리의 완성도가 높은 영화나 게임에서도 개연성이 다소 부재한 것은 자주 보이는 일이다. 소설보다는 어느 정도 압축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니까.
시나리오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게임 시작 30분 내에 결말이 대충 예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말은 당연하게도 그렇게 흘러간다. 이 말은 스토리에 반전이 있어야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반전이 없어도 훌륭한 이야기를 가진 작품은 얼마든지 있고, 반전병 걸려서 이상한 반전을 내세우는 작품도 얼마든지 있다.
시작부터 결말을 예측하기 위한 충분한 정보량이 주어진다는 것, 그게 문제다. 스토리 중심의, 사랑을 주제로 한 게임인 <투 더 문>과 비교해보면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힌 설명할 수 없지만- <투 더 문>은 단계별로 전체적인 스토리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주인공에게(그리고 게이머에게) 제공한다. 반면 <여름의 끝에 피는 꽃>은 대부분의 단서를 초반부터 던져버린다. 그렇기에 참을성이 없는 게이머들은 중반의 스토리를 사족이라고 느낄 지도 모른다. 차라리 조금 더 압축적으로 스토리를 짰다면 지루함이 좀 덜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름의 끝에 피는 꽃>을 추천할지 말지 물어본다면, 추천하는 쪽에 가깝다. 'K-인디게임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런 이유에서는 절대 아니고, 지극히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을 때 얘기다. 이 게임에 들어간 일러스트와 더빙 퀄리티만 생각해도 천원 값은 하고도 넘친다. 스토리도 비판하기는 했으나 완성도는 말했듯 괜찮은 편이다. 게다가 도전과제만 포기한다면 무료로 즐길 수도 있다. 미연시 성격을 가진 비주얼 노벨이 대부분 그렇듯 일본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 난다는 점에는 유의하자.
개인적인 점수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