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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re Apr 05. 2019

꿈에 대한 애달픈 집착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나는 뭐든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그랬다. 체력이 나빠도 경찰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머리가 나빠도 과학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법대를 가지 않아도 내가 원하면 변호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고, 책을 좋아하니까 작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인 줄 알았다. 초등학교, 아니, 넉넉잡아 중학교 때 까지의 나는 그랬다.


머리에 조금씩 뭔가가 들어가기 시작한 뒤부터, 세상이 그렇게 녹록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은 널렸고, 머리 좋은 사람은 지천에 깔렸다. 그리고 나는 이런 불안에 사로잡혔다. '나는 모든 게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느 날 읽은 소설의 한 구절이 그런 나에게 뼈저리게 다가왔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 온 셈이다. <서정인, 강>


우리는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저마다의 장애물도. 돈, 가족, 신체적 장애, 질병. 더 거대하게는 사회, 체제, 국가. 그런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는 것을 우리는 '철이 든다', '어른이 된다'라고 말한다.


철이 들어 그 벽 앞에 좌절하더라도, 우리는 이따금 다시 그 벽을 부수기 위해서 노력한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한층 더 고귀한, 혹은 숭고한 무언가를 위해서. 헤르만 헤세의 말마따나 '새가 알을 깨고 날아가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주인공 리사(매기 질렌할 분) 역시 그렇다.


그녀의 투쟁은

유치원 선생님이자 엄마이자 아내인 리사. 그녀는 삭막하고 정체된 현실에서 예술적인, 혹은 정신적인 가치를 이루고 싶어하는 중년 여성이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평생교육원에서 시 수업을 듣지만 자기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그녀의 시는 동료와 교수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는다. 리사가 깨어야하는 알은 그녀에게 너무 단단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지미가 나타난다.


꼬마 시인 지미, 유치원 선생님 리사

하원 시간, 리사는 우연히 지미가 중얼대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아이가 시를 짓고 있음을 깨닫는다.


애나는 아름답다
나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태양이 그녀의 노란색 집을 두드린다 
마치 신이 보낸 신호처럼


지미는 어쩌면 신이 리사에게 보낸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미의 천재성을 알아본 리사는 그가 지은 시를 자신의 시 수업에서 발표한다. 교수와 동료들은 대단한 시라며 그녀를 치켜세워준다. 그녀는 지미라는 도구로 자신의 알을 깨기 시작한 것이다.


지미의 천재성에 확신을 가진 리사는, 그의 재능을 자기가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지미가 삭막한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통제하려고 한다. 지미의 근처에는 나쁜 말, 현실적인 가치, 평범한 것은 없어져야 한다, 지미는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로 남아있어야 한다.


리사는 정말로 아이의 주변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기자일을 하는 지미의 삼촌을 찾아가 상담을 하고, 지미를 평범한 아이처럼 대한다는 이유를 들어 아버지에게 보모를 해고하라고 한다. 그리고 지미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며 시가 떠오르면 언제든 자기에게 전화를 해 들려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날, 리사의 발전을 대단하게 여긴 시 수업의 교수는 리사에게 낭독회 참여를 권한다. 리사는 거기에 자기 대신 지미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지미의 아버지 몰래 낭독회에 그를 데리고 간다. 자신이 가꾸어낸 천재를 세상에 보이기 위해서.


아이의 고통이
시를 낭독하는 지미

"시는 당신이 지은 거죠? 이 아이는 당신의 시적 매개체인가요?"


"아뇨, 아이가 지은 겁니다."


리사는 낭독회 자리에서 시를 지은 것이 자신이 아닌 지미임을 밝힌다. 교수는 그런 그녀를 허세가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지미는 자신의 시에 나오는 '애나'가 보조선생님인 메건이라고 말한다. 지미의 아버지는 아이를 몰래 낭독회에 데려간 것에 책임을 묻고 유치원을 옮겨버린다. 알을 깰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낭독회가, 반대로 리사를 더 알 속 깊숙히 끌어내려 버린다.


하지만 리사는 포기하지 않는다. 지미의 새 유치원에 찾아가 그를 꼬신 다음, 국경 근처의 어느 호수로 여행을 떠난다. 지미는 리사가 별장에서 샤워를 하는 사이, 화장실의 문을 잠가 버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납치를 당했다고. 리사는 그런 아이를 향해 애달프게 외친다.


"세상이 널 지워버리려고 해. 결국 너도 나 같은 그림자가 될 거야."


결국 경찰이 출동하고 지미는 그들의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그는 닫힌 경찰차 밖으로 또렷하게, 혹은 애처롭게 말한다. 


"시가 떠올랐어요, 시가 떠올랐다구요."


천재를 향한 사랑, 투쟁을 위한 집착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자식에게 집착하는 부모'는 꽤나 많이 다루어지는 문학적 소재다. 현실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기도 하고.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그 극단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리사는 지미가 그녀의 페르소나, 얼터 에고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가 지미를 지켜줘야 한다고 믿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지만, 이 얼마나 애처로운가.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혼란스러워진다. 리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지미에게는 정말 리사와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니었을까? 잘못된 건 그녀가 아니라 이 세상이 아닐까?


미술관에 간 리사와 지미

리사의 눈에 세계는 잘못되어 있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아이들, 비속어를 쓰는 소년들, 해병대에 입대하겠다는 아들, 성인이 되자마자 담배를 태우는 딸. 그 모든 게 잘못되어 있다. 그녀는 세상이 훌륭한 가치를 상실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감독은 영화 내내, 그녀의 편협한 사고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세계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어머니에게 막말을 하는 딸,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이가 이상하다는 남편, 돈만을 지상 가치로 삼는 지미의 아버지, 그리고 지미의 시를 들어주지 않는 세상.


영화에서 리사와 세계는 끊임없이 갈등한다. 리사는 지미를 세계로부터 격리시키려 한다. 그리고 세계는 다시 지미를 붙잡아 돌려놓으려고 한다. 둘 다 지미가 다른 쪽의 세계는 쳐다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애쓴다. 분명 양쪽 다 잘못되어있다.


지미가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리사와 리사를 둘러싼 세계가 화해해야 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영화는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리사의 딸이 어머니에게 사과한 것처럼, 리사가 아들의 입대를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는 꿈만 보고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오직 현실적 가치에만 집중하며 살 수도 없다. 현실을 보며 걸어가고, 때때로 꿈을 가로막고 있는 알껍질을 두드리며 살아가야 한다. 한 쪽으로 치우쳐버리면 우리는 결국 파멸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투쟁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끌어들였을 때 어떤 위험이 닥칠 수 있는가. 심지어 그 사람이 어린 아이라면. 리사는 지미를 알을 부수기 위해 사용했다. 아버지는 지미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알 깊숙한 곳에 계속 머무르게 했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가 결국 우리에게 남긴 건, 치우침과 편협함에 대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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