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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re Jan 14. 2020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화가 마리안느는 결혼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의뢰를 받고 외딴 섬으로 향한다. 하지만 초상화의 대상이 되어야 할 엘로이즈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초상회도, 포즈를 취하는 것도 거부하고 있는 상태. 마리안느는 화가임을 숨기고 엘로이즈 곁에서 그녀를 관찰하며 초상화를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매우 감각적인 영화다. 음악, 풍광, 미묘한 소리들, 빛, 색채. 그 중 가장 신경쓴 소재는 아마 불꽃인 듯하다. 제목부터 '타오르는'이니 말이다.


영화에서 불을 상당히 자주 잡아준다. 집의 모닥불, 담배불, 촛불, 야외의 커다락 모닥불까지.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듯 불이 타들어가는 소리도 세심하게 들려준다. 하지만 영화에 가장 자주 비치는 불은, 주인공 마리안느일 것이다.


마리안느는 시종일관 붉은 옷을 입고 있다. 그녀는 실패한 엘로이즈의 초상을 태우고, 그녀의 옷에도 불이 붙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타오르는 눈빛으로, 엘로이즈의 마음에도 불을 붙인다.

'눈빛', 그렇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라봄'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그녀 몰래 힐끔힐끔 바라보며 사랑은 시작되었고, '나를 봐' 라는 엘로이즈의 절규 섞인 외침을 마리안느가 뒤로 하며 영화는 닫힌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말한다. 네가 초상화를 그리기위해 나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다고, 그게 평등한 거라고. 엘로이즈에게는 그런 평등한 시선의 교차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얼굴조차 '본'적 없는 밀라노의 이름 모를 남자가 아니라, '바라볼' 수 있는 마리안느인 것이다.


작중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설화 이야기가 나온다. 오르페우스는 지옥의 신 하데스를 설득하여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해서 빠져나가게 된다. 하데스는 대신 하나의 조건을 그에게 걸었는데, 그건 바로 완전히 이승으로 빠져나가기 전까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는 명계와 이승의 경계에서 에우리디케를 뒤돌아 바라보고 말았고, 결국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옥에 빠지고 만다.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선택을 한 거라고 말한다. 연인 대신 시인이 되는 걸 선택한 거라고. 엘로이즈는 어쩌면 에우리디케가 뒤를 돌아보라고 부탁한 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화에 대한 둘의 의견은 영화에서 그들 각각의 행동, 생각과 일치한다.

마리안느는 자유로운 영혼이자 오르페우스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반면 엘로이즈는 명계에 속박된 에우리디케다.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 역시 자신처럼 어떻게해도 명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렇기에 오르페우스가 자유롭게 떠나기 전, 한 번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뒤를 봐' 라고 말한 것이다.


엘로이즈는 결코 명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리안느도, 엘로이즈도, 관객도, 모두 그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녀들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마리안느는 에우리디케를 명계에서 꺼내줄 수 없는 오르페우스였던 거다.


마지막 순간, 문을 닫기 전 마지막 시선, 두 세계를 나누는 선을 넘기 전에 서로를 바라본 그녀들. 그걸로 둘의 세계는 완전히 갈라진다. 훗날, 두 여인이 멀리서나마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바라본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바라보지 않는다. 마치 명계의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마리안느는 실패한 오르페우스다. 하데스가 허락한 둘의 짧은 시간이 지난 지금, 에우리디케는 다시는 오르페우스를 바라볼 수 없다. 단지 28p와 같은 암호로 비밀스럽게 사랑을 암시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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