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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re Mar 07. 2020

중경삼림(1994)

누군가 내게 중경삼림을 왜 좋아하냐고 물으면, 나는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요' 이외의 대답은 정말로 하지 못할 것 같다. 사실 그건 제대로 된 답변이 아니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 중에 분위기가 죽여주지 않는 영화는 없으니까. 화양연화, 아비정전, 동사서독, 일대종사, 춘광사설 모두 연출이나 미장센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영화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저 영화들보다 유독 중경삼림을 좋아하는 걸까? 스토리의 깊이도 다른 영화보다 얕은 이 영화를 말이다.


개인적으로 중경삼림은, 왕가위 작품 중 패스트 푸드 같은 영화라고 느낀다. 화양연화처럼 깊은 맛도, 동사서독처럼 동양적인 맛이 한껏 나는 음식도 아닌 패스드푸드. 인상이 깊게 남지는 않지만 맛있고 또 찾게 되는 맛. 나는 이런 중경삼림의 매력은 아름다운 흐릿함에서 나온다 생각한다.

633(양조위)을 바라보는 페이(왕페이)

중경삼림에서는 모든 게 흐릿하다. 인물의 이름도, 배경도, 촬영된 장면도, 음악도. 이름이 거의 불리지 않는 인물들이, 흔들리는 카메라 너머로, 다인종의 혼란스럽고 퇴폐적인 홍콩을 거닐며, 흐릿한 거울과 유리, 수조 등을 통해 누군가를 바라보는 영화가 중경삼림이다.


분명 이러한 흐릿함에 큰 영양가는 없다. 내게 엄청난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고 재미나 교훈을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 묘사된 이 아름다운 흐릿함은 나를 고양시킨다. 마치 환상 소설이나 동화에 깊게 몰입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분명 영화의 배경은 20세기 말의 현대 홍콩인데도 말이다.


223(금성무)

나는 중경삼림을 볼 때면 상당히 초현실적인 감각을 느낀다. 정확히 어떤 식의 초현실적인 건지는 묘사하기 어렵다. 영화가 주는 흐릿한 인상처럼 말이다. 90년대로 돌아가 레트로틱한 티비 광고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사이버펑크틱한 미래의 도시를 걷는 것 같기도,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혹은 한낮의 단꿈을 꾸는 것도 같은. 중경삼림을 보고 몽중인을 켜둔 채 잠에 드는 날이면, 나도 꿈 속에서 중경삼림의 홍콩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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