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어느 국립공원 등대를 주변으로 알 수 없는 천연색 경계가 생겨난다. 정부는 그 곳을 쉬머라고 명명하고 몇 번이나 탐사대를 보냈으나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다. 케인(오스카 아이작 분)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돌아온 케인은 마치 혼이 빠진 사람처럼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더니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쉬머와 남편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케인의 아내이자 생물학자 리나(나탈리 포트만 분)은 탐사대와 함께 쉬머 안으로 들어간다.
알렉스 갈란드 감독은 전작 <엑스 마키나>에서도 그랬듯, 확실히 SF 미스터리물을 대단히 잘 만들고 또 좋아하는 것 같다. <엑스 마키나>에서는 좁은 공간에서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조명하는 미스터리물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한층 스케일이 커졌다. 감독은 <소멸의 땅>에서 마치 외계의 행성과 같은 풍경을 아름답고 무섭게, 그리고 진중하게 묘사하고 있다.
리나와 함께 들어간 탐사대원은 모두 죽었지만, 리나는 문제의 근원인 등대에 백린탄을 터뜨리고 가까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온갖 기형화된 동식물들을 맞닥드렸고, 탐사대 내부의 분열까지 있었다. 그리고 등대에서는 사실 진짜 남편은 죽었다는 안타까운 사실까지 알아낸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리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을까? 그녀에게는 삶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탐사대원들은 모두 어느 정도 생의 의지를 포기한 사람들, 자멸을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딸이 죽었거나, 자해 시도를 하는 등 정신적 문제가 있거나 등. 리나를 제외한 탐사대원들은 자의적, 타의적으로 쉬머 안에 남는다.
그것은 리나의 남편 케인도 마찬가지였다. 케인은 리나가 외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맥락 상으로 볼 때)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줄 알았던 아내가 외도를 했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하던 케인은 스스로 쉬머 안에 들어가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케인 역시 나중에 온 리나와 마찬가지로 등대에 도달했지만, 그는 거기서 죽는 걸 선택한다. 어딘가 어긋나버린 부부관계를 되돌릴 방법은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리나는 경우가 달랐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부부 관계에 이상이 생겼음을 스스로 알았고, 남편이 들어갔던 쉬머에 들어가면 그걸 해결할 수 있을거라는 알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쉬머 안에 들어갔다. 남편과의 관계성을 해결할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을.
하지만 쉬머 안은 괴이한 세계였다. 영화의 표현대로 하면 동물, 식물, 인간의 DNA와 특성이 모두 Scrambled된 상태였던 것이다. 식물이 인간처럼 자라나고, 동물이 인간의 소리를 내고, 인간인 탐사대원도 몸의 변형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쉬머는 모든 것이 조화롭지 못하게 뒤섞이고 있는 공간이었다.
영화는 쉬머 안의 상황과 리나와 케인의 관계를 교차하며 보여준다. 마치 쉬머처럼, 그들의 부부관계도 조화롭지 못했다는 걸 강조한다. 케인의 파견이 잦았던 탓에 리나는 외로움을 느꼈고, 결국 그녀는 동료와 외도를 하고 만다. 리나와 케인은 분명 부부, 결혼이라는 걸로 묶여져 공존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진정한 서로는 몰랐다. 적어도 사랑하는 아내가 외도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케인은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쉬머 안에서, 케인은 자멸을 택하고 외계인이 만들어낸 자신의 클론을 세상 밖으로 내보낸다. 그것은 케인에게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리나와의 진정한 결합은 이제 틀렸지만, 자신과 같지만 전혀 다른 존재인 클론이라면 다시 결합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 좌절 끝에서 잡은 한 줄기 희망.
하지만 리나는 달랐다.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문제를 만든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클론을 죽이고 쉬머를 빠져나간다. 그런 그녀가 '조화롭지 못한' 쉬머의 세계를 파괴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길고도 괴이한 부부싸움, 혹은 가정사 해결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면 부조화한 세계인 쉬머가 파괴되고 빠져나온 이후, 리나와 케인의 클론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그들은 쉬머 안에서 부조화를 직면하고 나온 존재인 동시에, 쉬머가 만들어낸 부조화스러운 존재들(리나 역시 신체의 변화를 겪었기에)이다.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 지는 모를 일이지만, 쉬머와 같은 부조화의 끔찍함을 목격한 만큼 이전과 어딘가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영화 마지막 두 사람의 포옹은 감독의 그런 긍정적 암시가 아닐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