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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Oct 14. 2020

김대현의《A Day of Days》

시니피에(signifié) 게임

- 본 글은 [월간도예] Vol.295(2020년 10월)에 게재된 필자의 편집 전 원고입니다. -

2019년 안국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신진작가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대현의 두 번째 개인전이 갤러리 AG에서 개최되고 있다.《A Day of Days》展은 일상 속의 신기루, 혹은 꿈과 같은 어느 하루의 서사를 담고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하나의 벽면을 가득 채운 다양한 질감의 오브제와 네온사인이 시선을 붙든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사와 예술전문사 학위를 취득한 김대현의 장점인 다양한 매체의 활용이 돋보인다.     

 

벽면의 무수한 피규어들을 지키는 듯 수문장 같은 투명 토르소 <Kuros>를 시작으로 전시는 <Garden>, <Dewy Eve>, <Night Fell> 네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A Day of Days》는 설치 방식에 의해 고대 이집트 파라오 무덤 벽화 혹은 예수의 일대기를 연상시킨다. 작품에 철저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작가는 전시실 내부의 벽면 중 정면의 벽에만 작품을 설치했다. 힌두교와 기독교를 비롯하여 동·서양 미술의 코드가 내재된 피규어들은 무작위로 나열된 듯 보이지만 수평과 수직, 대칭과 비대칭을 반복하며 시각적 리듬을 생성한다. 작가는 관람자와 오브제가 재현한 기호의 의미 찾기 게임을 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동시에 보편적 기준 그리고 그것이 지닌 힘의 실체를 드러낸다.    

시간과 공간의 해체 

신체가 절단된 토르소, 뱀의 머리와 꼬리, 밧줄과 계단, 매끈한 표면의 반짝이는 틀에 갇혀 추락하는 십자가를 비롯한 크고 작은 피규어들은 기호로써 따로 또 같이 작가의 언어를 대변한다. 그가 제작한 기호들은 마치 시공간이 바뀌는 영화 속 장면처럼 화이트큐브 내의 모든 시각적 방향성을 교란시킨다. 이는 직립보행의 인간이 지닌 공간의 위치감각을 모두 해체한다. 네 개 작품 곳곳에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자세를 취한 토르소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계단은 관람자의 위치를 이동시켜 마치 하늘에서 땅을 바라보는 것 같은 전지적 시점을 야기한다. 공감각의 혼돈 속에서 유일하게 뱀만이 관람자의 시선에서 정방향을 유지하도록 배치되어 시각적인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왼쪽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투명한 오브제들의 반짝임과 뱀의 운동성을 따라 에덴동산의 낮에서 십자가가 추락하는 밤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작가는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평이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각각의 작품 내에 별도의 시간적 장치를 심어두었다. <Garden>의 상단에 위치한 흰색 구와 하단의 검은색 딸기, <Dewy Eve> 상단과 하단의 반구의 형태, <Night Fell>의 네온사인과 뒤집어진 십자가는 수직적인 시간을 상징하는 기호로써 작품 내에서 별도의 시간대를 구성한다. 그는 타 문화의 다양한 관심과 지속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재현할 기호를 선택한다. 문화에 따라 다르게 다양한 의미를 지닌 기호는 세라믹이나 크리스털 레진, 아크릴 파이프를 매체로 재탄생한다. 욕망을 깨닫게 해 준 뱀, 선악과를 대체하는 검은 딸기, 밤 혹은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검은 반구의 오브제들은 낮과 밤, 선과 악, 성과 속의 대비 속에서 별도의 감각적인 시간대를 조성한다. 감각적 시간은 수평으로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수직으로 교차한다.      

의미의 단서들을 쫒는 게임은 시간과 공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전시는 관람자의 조망점을 지상에서 상공으로 이동시키며 동시에 비가시적인 화이트큐브의 이면을 상상하도록 유도하면서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다. 전시실 내의 감상 주체는 오로지 시각에 의존한 인지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체감하게 된다.       

보통과 표준이 지닌 폭력성 

전시는 사물을 인식하는 판단 형식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논지의 선험적 조건, 즉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보다’가 필요하다는 것을 밝힌다. 오브제의 의미 규정 과정에는 대상이 관람자의 망막을 자극한 후 무엇인지 파악하는 인지의 단계에서 지식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벽면에 설치된 오브제들은 인지 과정에 숨겨진 장치(tool)이자 선험 조건인 ‘시각’과 ‘상식으로써의 의미’를 가시적 수면으로 올리는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김대현은 적확히 우리의 시선에 씌워진 ‘보통’의 폭력성을 겨냥한다. 보통성 및 보편성은 다수의 통일성을 바탕으로 조성된다. 통일된 논리는 공적 교육을 통해 현대인의 표준화된 언어로써 작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하나의 단일 상식을 만들어 사회적 결속을 이끌기 위해 종족이나 계급, 젠더의 문제는 배제된다. 이 문제를 논쟁적으로 만들고자 그는 미술사에 내재된 코드를 활용한다.       

투명 아크릴파이프로 제작된 토르소는 시선을 투과시켜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치부되는 타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드러낸다. 또한 투명한 신체는 아크릴 너머의 ‘Love Me Hard’ 네온사인을 왜곡시켜 경계 외부의 대상들에게 비추어진 보편적인 시선을 대변한다. 문지기 역할을 하는 이 <Kuros>는 고대 그리스 아르카이크(Archaic Art)에서 보이는 청년 나체 입상을 말한다. 쿠로스는 일반적으로 여성 입상인 코레(core)와 짝을 이룬다. 그러나 김대현의 작품에서는 두 청년 입상이 좌측 방향을 보는 측면으로 설치되어 있다. 이는 동성애를 비롯하여 통일성을 위해 배제된 대상에게 가해지는 차별에 대해 서양미술의 기원인 그리스 미술의 코드를 활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김대현은 이야기를 지속한다. <Garden>의 매끈한 피부와 여성스러운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한 남성 토르소는 마치 반으로 나뉜 성배 안에서 탄생하듯 설치되어 있다. 자세와 ‘탄생’의 의미로 이 기호들은 자연스럽게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 Birth of Venus>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남성 성기로 인해 그 의미는 표상으로부터 떨어진다. 토르소의 좌우에 설치된 백합은 순결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헤라클레스의 일화와 연결되어 다시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Dewy Eve>에서 유연성을 상실한 채 딱딱함을 유지하는 밧줄은 게이의 아이콘이 된 성 세바스찬을 상징하기도 하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대상은 13마리의 뱀이다. 에덴동산의 뱀은 역설적으로 코브라가 전지적 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019년 신당창작아케이드 10주년 기획전시 《Quantum Leap》와 다른 코브라의 위치 변화는 힌두교에서 우주의 신 비슈누와 함께 나타나는 형상으로 뱀이 지닌 의미의 다양성을 보다 강조하는 효과를 거둔다.      


작가의 교묘한 게임에 의해 다양한 기호들은 보편적인 의미를 위해 배제되었던 내용을 불러와 다양한 사고를 촉구하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그의 속(俗)적인 기호들은 성(聖)의 영역을 재현한 서양미술사의 기원이나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명화의 코드와 접합되어 보편성에 혼란을 일으킨다. 기호가 지닌 보편적 의미를 해체하는 과정은 혼란을 야기하는 의미의 접합뿐 아니라 오브제 제작 과정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된다. 쓰레기통 뚜껑을 캐스팅한 둥근 오브제는 그 색채가 지닌 운동감과 화려함으로 가장 눈에 띈다. 아마도 작가 스스로 자연스럽게 세상에 융화되려는 심연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보편성’이 지닌 폭력에 힘으로의 대응이 아닌 부드러움으로 마주하는 김대현의 심력이 돋보인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소재의 성질과 전혀 다른 질감을 표현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함정을 재료의 활용에서부터 파놓은 것이다. 컵의 받침과 몸체는 분리되어 재기능을 상실하고, 성배로써의 의미는 해체된다. 토르소는 머리가 절단되어 정체성을 잃고 ‘남성의 신체’로 일반화된다. 작품 내에서 유연한 재료는 고착화된 의미로, 그 의미는 작가의 손을 거쳐 배제된 내용을 소추하며 변화한다. 즉, 개인의 정체성에서 대중이라는 통일된 집단으로, 특정한 하루에서 일상적인 날들로 확대되고 보편성을 지닌 의미는 다시 미시적인 상태로 돌아와 특별한 개체로 환원되는 것이다. 전시 제목 ‘A Day of Days’는 거시와 미시를 왕복하는 의미의 순환구조를 암시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이 순환과정은 보편적 통일성을 위해 배제되었던 기호의 의미를 소추하며 우리의 시야에 ‘보통’이라고 기준이 씌워져 있음을 상기시킨다. 교육에 의해 습득된 ‘보편적 인식’이 대상의 인지 과정에 개입하여 판단형식의 장치로 작동하는 지점을 겨냥한 것이다. 작가는 타자들을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치부하는 표준화된 기준에 내재된 폭력성을 기호의 의미 게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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