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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Nov 04. 2020

[영화] 아미스타드

“Give us FREE!”

53명의 흑인들을 태우고 사탕수수 농장으로 향하던 아미스타드 호(La Amistad), 그 안에서의 반란과 이후 재판 과정을 재현한 영화 <아미스타드>는 노예무역의 야만성을 다루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자 사이의 거미줄 같은 이해관계와 당대 권력층에게 박혀있는 ‘자유를 누릴 권리’에 대한 논의를 이끌고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임에도 영화 내에서는 피부색에 따라 특정 인종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자유’였습니다.

아미스타드 사건을 알리기 위해 노예 폐지론자들의 작성한 전단. 아프리카인들은 자유를 되찾고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봉기했다는 점을 서술함.(출처: 중앙일보 2013.7.2)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던 싱케이는 갑자기 납치되어 노예선에 타게 됩니다. 그가 나포된 아미스타드 호에서는 스크린 속 영상이었음에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사람을 가축으로 취급하고, 망가진 도구처럼 버리는 행태들은 믿을 수 없지만 실제 벌어지던 일이었습니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17세기 계약 노동자의 형태에서 시작되어 1865년 노예제가 폐지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다른 방식으로 구별은 지속되었지요. 1807년 영국에서는 노예무역이 폐지되었고, 미국에서는 노예매매가 금지되었으나 영화에서 나타나듯 1839년에도 여전히 불법적인 납치와 노예를 분류된 사람을 판매하는 만행은 계속되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18세기와 19세기에 신대륙 발견 이후 노예의 상품화와 대규모 무역이 활달하게 이루어지며 노예무역이 팽창되던 시기입니다. <아미스타드>에서도 검은 피부를 지닌 사람들은 ‘화물’로 취급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자유를 위한 조직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납치된 흑인들의 자유에 대한 논쟁이 아닌 스페인 국왕 혹은 미국 해군 장교의 소유인지를 두고 대립하는 어이없는 상황으로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 변호사와 싱케이 사이의 언어장벽은 당대 흑인과 백인을 가르는 기호로 등장합니다. 재판 과정 중 “Give us FREE!”를 외치는 모습은 영어로 소통하는 이들이 자의적으로 부여한 그들만의 특별한 세계에 힘겹게 손을 내미는 싱케이의 절실함이 담겨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피부색과 언어는 개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기호입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이 이 개체성에 적용하는 불평등한 사회적, 문화적 여러 규제들은 비단 노예제에서만 드러났던 것은 아닙니다. 19세기에 이미 폐기된 노예제 이후에도 백인(게다가 남성)들이 지닌 특권의식은 그들과 다른 타 인종들에게 지속적으로 차별의 형태로 반복적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 차별을 정당화하는 금발의 갑부 때문에 미국은 매일 시끄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요.

1993년 3월 5일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휘트니비엔날레 관련 기사 /  참여작가 비율

오늘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모두 타자로 치부해버리는 미국 문화의 특수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던 미술계의 움직임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바로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입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백인 문화가 주류를 이끄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 전시입니다. 이 비엔날레에는 총 82명의 작가, 그 중 30명의 유색인종이 참여했습니다. 또한 뉴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휘트니비엔날레의 특성을 와해하고 시카고, L.A.와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등 다양한 지역의 작가들이 참여하여 지방분권화를 꾀했지요. 장르에서도 뉴미디어와 설치미술의 급격한 확산 양상을 반영하기도 했습니다. 여성과 동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의 작품을 전시하여 ‘소수’로 치부되던 미국 문화권 내의 타자를 중심으로 다원주의, 다문화에 대한 논의를 이끌었습니다.

Daniel J. Martinez,  “I can’t imagine ever wanting to be white.”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인가? 아니면 아니면 침략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서구 식민주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비판

93년 휘트니 비엔날레는 이렇게 진정한 미국 문화가 무엇이며, 누가 미국인인지 나아가 미국의 정체성에 대해 현실적인 이야기를 끌어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지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미국적인’ 것으로 변해야만 했던 기존의 용광로와 같은 양상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와 다른 정체성을 그 자체로 인정하려는 긍정적인 다원주의를 꾀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Barbara Hammer, , 1992, 16mm balck and white movie(67’)

이 전시는 휘트니 비엔날레 역사상 최초로 국경을 넘어 서울에서 그대로(?) 전시되었습니다. 90년대 세계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던 국내 분위기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성장뿐 아니라 문화적 수준도 국제적 수준으로 향상되었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었지요. 그러나 미국 내의 문화적 문제에 대해 미국의 명망 있는 비엔날레에서 다루었던 전시를 그대로 한국으로 옮겨오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문화, 예술이라는 자유로운 영역에 정부가 개입해 세계화라는 성과를 이룩하려는 시도 자체와 메타비평의 부재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또 다른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바로 ‘번역’의 차원입니다. 언어의 번역을 넘어 문화적인 번역이 필요했는데, 그 점이 간과되었습니다. 또한 '한국적 정서'를 고려한 검열도 문제로 부상되었지요. 바바라 해머와 신디 셔먼의 작품은 당시 비엔날레 주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음에도 검열을 통해 전시에서 배제되었습니다. 또한 수입 외서를 검토하는 정부의 관리 검열을 피하지 못한 작가로 찰스 레이가 있었지요. 모든 면에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면서도 단지 세계화라는 외형만 만들고자 도전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서울에서의 전시는 미국의 다문화, 다원주의에 대한 주제를 다루지 못하고 애매하게 광범위한 설명만 제시하면서 문제제기에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또한 글이나 대사의 번역으로 인해 작품보다는 텍스트가 범람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전시는 미국 내에서 제기했던 직접적인 논쟁보다는 단순히 복합적인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 미국이라는 엉뚱한 해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흑인 노예무역에 대한 영화 <아미스타드>는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작동되는 수직적인 계급구조가 얼마나 비 인륜적인 범죄였는지 다루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자행되던 일들은 90년대 미국의 문화권 내에서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휘트니 비엔날레가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동시대 미국은 여전히 그 시각으로 몸살을 앓고 있지요.

바다 건너의 일로 치부하기엔 우리 사회에도 만연해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할 것 같습니다. 서울로 옮겨온 전시가 유치 과정과 결과를 통해 준비되지 않은 태도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많은 변화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n번방 사태, 유명 연예인들의 조직적인 성범죄 그리고 상급자의 폭행과 온라인에서의 폭언으로 인한 자살, 코리안 드림을 위해 타국에 온 분들을 대하는 태도들은 영화 속 백인들과 닮아 있습니다. <아미스타드> 가 재현한 검은 피부와 흰 피부, 부를 지닌 자와 노동을 대가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스크린 속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또한 영화에서 인권이나 자유에 대한 논쟁이 아닌 소유권의 대립이 첨예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 사회 역시 윤리적 측면 보다는 결을 나누고 폄훼하는 논쟁에 열을 올리는 듯 보입니다.  이 같은 시각에 일침을 가하는 예술계의 움직임이 부재하다는 사실 또한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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