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개봉한 일명 퍼니메이션(fun+animation) <몬스터 주식회사 Monsters, INC.>는 아이들의 비명소리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살아가는 괴물들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 두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바로 ‘문’인데요. 무늬와 색상이 각기 다른 문들이 특정 기기에 연결이 된 순간 그 문의 주인공이 사는 인간 세계와 몬스터들의 세계는 연결이 됩니다. 보통은 몬스터들이 문을 열고 아이 방으로 들어가 겁을 준 후, 들려오는 아이들의 비명소리를 충전식 통에 담고, 그 비명은 괴물들의 삶에 필요한 전력으로 활용됩니다. 이들은 아이와 그들의 물품이 독성이 높아 조금이라도 닿으면 죽는다고 알고 있지요. 양말 한 짝이라도 자신들의 세계로 들여오는 순간 위험물 제거와 감염 바이러스 퇴치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검역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심지어는 강제 제모도 당하게 됩니다. 그런 몬스터들의 세계에서 겁주기 선수 중 최고로 손꼽히는 털북숭이 설리는 어느 날 자신을 야옹이라고 부르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아이가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이를 납치해서 보다 더 강한 비명을 채집하려는 타 괴물과 그 아이를 다시 본래의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설리와 마이크 와조스키의 코믹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바로 <몬스터 주식회사>입니다.
최근 영화를 다시 보니 이전과 달리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곳과 저곳을 매개하는 ‘문’에 대한 집착이 생기더군요. ‘문’이라는 대상만 두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기준으로는 내부도 외부도 존재하지 않고 문을 여는 주체의 위치에 따라 안과 밖에 설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또, 내가 서 있는 장소와 문을 열고 향할 곳이 ‘문’이 세워지기 전에는 같은 선상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도 문 너머에 세계는 주체가 인간 혹은 괴물에 따라 전혀 다른 타지로 설정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몬스터 주식회사> 도입부에는 귀여운 많은 문들이 등장하는데요. 물론 영화 내내 ‘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보면서 지속적으로 연상되던 작품이 있습니다. 한국 현대미술의 1세대 작가로 손꼽히는 정창섭의 닥종이 연작입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작가이고, 또 언젠가 로또에 당첨이 된다면 꼭 소장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꿈이 너무 컸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정창섭은 1927년 생으로 1952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특선하며 화단에 등장했습니다. 초기에는 실험적인 작품도 제작하였으나 1970년대부터는 닥종이를 활용한 회화를 통해 한국적인 조형미를 작품에 담았습니다. 닥에 대한 그의 애착은 2000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정창섭, <귀歸 77-N>, 197x110cm, 1977.
그의 작품 중 1970년대 주로 제작되었던 <귀歸> 연작은 시골 초가집의 창호지 문과 연관이 있습니다. 시간대에 따라 다르게 빛을 투과하는 창호지 문에 대한 그의 기억은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어린 시절의 창호지 문에 끼워진 잘 마른 꽃잎의 그림자와 빛의 파장에 대한 기억은 정창섭의 작품에 오롯이 반영됩니다.
종이의 특성을 활용한 먹이 번지는 효과는 창호지 문을 통해 투과되던 빛에 대한 현전이며 상실되어 가는 전통에 대한 기억과 도시 사이의 괴리,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작가의 심연을 드러냅니다.
“문종이의 누르스름하게 바랜 빛 속에서 시간의 앙금을 느끼며 [...] 공간의 물성과 그 여백을 즐겼던 것” - 정창섭, 「자연주의와 무위의 조형관」-
정창섭의 <닥>연작 중 일부 확대 <이미지 출처: News 1>
1980년대에 들어서면 그는 닥종이를 물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닥 나무껍질을 벗기고 오랜 시간 삶은 후 절구에 찧고 다시 풀과 섞어 물 빼고 건조하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닥종이가 완성이 됩니다. 작가는 이 닥종이를 물에 불리고 풀어내어 나무의 섬유질 상태로 다시 되돌립니다. 걸쭉한 반죽의 상태가 된 섬유질 덩어리를 캔버스나 면포 위에 얹고 불을 때며 건조하면서 우연하게 드러날 그것을 기다립니다. 닥종이는 본래 누르스름한 색을 띠기에 그의 <닥> 연작은 대부분의 색이 유사합니다. 또한 작가의 인위적인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건조되며 섬유질이 얽힌 상태가 우연한 어떤 효과를 야기합니다. 이 작품은 시골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창호지 문에 대한 은유이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문, 작가의 육체에서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이어주는 문을 상징합니다.
정창섭, <닥 86088>, 330x190cm, 1986, 국립현대미술관.
아마도 작가는 모더니티의 화려한 욕구 이면에 위치한 노동의 부재를 자신의 반복적인 신체 활용을 통해 부각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자동화된 기계가 장인과 같은 숙련된 기술자를 대체하기에 한지(韓紙)를 한지(寒紙)로 만드는 작가의 신체 개입은 당대 변화의 이면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정창섭은 한국 전통의 종이인 한지(韓紙)를 추운 겨울 찬 물에 담가 손으로 반죽하였기에 한지(寒紙)라 불렀습니다. 번화한 도시나 화려한 서구 미술에 대한 예찬보다는 한국적인 것의 뿌리와 전통 등 우리의 정체성 자체에 대해 보다 깊은 사유를 지향했던 정창섭의 사유가 돋보입니다. 이는 1970년대 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닌 작품 <귀 歸> 연작만 보아도 짐작이 되는 지점입니다.
(우) 2016년 국제갤러리에서 개최된 정창섭 개인전 전시 이미지
<몬스터 주식회사>의 ‘부 Boo’와 설리는 각자 다른 세계에 속해 있지만 분홍색 꽃무늬가 그려진 문을 열면 만날 수 있었지요. 영화 결말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부서진 문은 본래의 조각이 아니면 다시 붙여도 그 방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설리는 자신이 간직하던 한 조각을 끼워 맞추고 다시 ‘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과거로의 회귀, 화려해진 도심 속 단조로웠지만 고요했던 고즈넉한 옛 시골, 현실에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지만 정창섭의 작품을 통해 내면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면 정신적인 세계만큼은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