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빌리언스>
지난주 다루었던 미국 드라마 <빌리언스>는 보면 볼수록 재벌과 권력 사이의 관계를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확고해집니다. 우리는 미술관에 가야 볼 수 있는 작품들을 드라마 속의 백만장자들은 자신의 공간을 장식하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하고, 동시에 작품의 가치는 곧 판매 가격으로 귀결되는 외면할 수 없는 시장의 논리에 조금은 환멸을 느끼기도 합니다.
시즌 4의 12화에서는 폴 고갱의 타히티 여인들의 모습이 담긴 작품이 등장합니다. <망고 꽃을 들고 있는 두 명의 타히티 여인들 Two Tahitian Women With Mango Flowers>(1899)이라는 이 작품은 시즌 5의 시작을 암시하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에서 자신의 미적 영혼과 감각을 다시 살찌우려 했던 폴 고갱의 의도와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욕구를 충실하기 위한 노력과 조금은 닮아 있는 듯 보입니다. 물론 고갱의 작품들은 당시 미술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색채론에 입각한 그의 강렬한 회화는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럼에도 서구 남성과 피지배국의 원주민이자 어린 소녀와의 관계는 여전히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빌리언스>에서도 주인공 엑스가 위 작품에서 남들이 말하는 그런 순수함이 느껴지는지 여자 친구에게 묻자 그녀는 “이 그림을 그린 남자를 생각하면... 썩 순수하지는 않다”로 답을 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시즌 5에서 찰스 로즈 시니어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며 능청스럽게 그리고 나름 진지하게 농담을 섞으며 자신의 두 번째 혼인서약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재혼의 상대는 미국 원주민 중 한 부족 출신으로 할아버지 찰스와는 상당한 나이 차이가 나는 어린 신부입니다. 시즌 4의 마지막 에피소드와 시즌 5 각각의 시작이 교묘하게 하나의 작품으로 귀결되더군요.
빌리언스는 늘 어마어마한 예술작품을 배경으로 등장시킵니다. 시즌 5의 첫 번째 에피소드 역시 엑스의 아파트에 엄청난 작품들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극에서는 찰스 로즈의 부인이었던 웬디 로즈가 별거를 위해 아이들과 그 아파트에 머무르게 됩니다. 웬디가 거주하는 공간에는 빈센트 반 고흐, 조르주 쇠라, 구스타브 칼리보트의 작품 등이 주인공과 카메라에 잘 포착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보다 더 잘 보살피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한 과정에 있는 인물과 해당 작품들을 동시에 보고 있으니 이 드라마 기회에 예술과 관련하여 조언하는 숨은 인물에 대한 존경심이 피어나더군요.
우선은 등장하는 작품에 대해 조금 설명을 하겠습니다. 시즌 5의 1화 중, 찰스 로즈와 웬디 로즈가 복도를 지나 거실로 걸어오는 장면에서 찰스의 우측에는 조르주 쇠라의 <서커스 사이드 쇼>(1887~88)가 보입니다. 그리고 웬디의 좌측에는 칼리보트의 <마룻바닥을 깎는 사람들>(1875)이 보입니다. 약 10년의 시간 차이를 보이는 이 두 작품은 ‘인상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의 작품은 사실주의의 기반을 두고 있는 초기 인상주의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인상주의를 탈피하려는 포스트-인상주의와 관련된 작품입니다.
칼리보트의 작품을 우선 보면 파리의 아파트 바닥을 대패로 깎아내고 있는 삼인의 노동자가 등장합니다. 기존의 노동자에 대한 미술계의 관심은 대부분 농업인이거나 광부와 같은 비 도시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칼리보트는 파리라는 대도시에서의 노동 계급을 작품에 담아 당시 많은 논란의 중심이 되었지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칼리보트는 성장 배경으로 작가보다는 오히려 후원자에 가까운 입지를 먼저 확보했습니다. 그런 그가 도시 노동 계급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킨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산업화되어 급속도로 발전하는 화려한 도시의 부는 부르주아 계급이 독식하고 실제 도시를 닦고 만들어가는 노동자들은 그 화려한 빛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으니 칼리보트는 그들을 작품을 통해 조명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또 그들의 존재함은 늘 사실이었으며 우리 모두 힘든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조금은 편안하고 화려한 삶을 꿈꾸는 것도 사실이지요. 당시 역시 그것이 현실이었으니 사실주의 화풍을 구사하던 칼리보트는 위와 같은 내용을 작품에 반영했을 것입니다. 작가의 시선이 바닥에서 일하는 삼인의 남성이 지닌 사회적 위치를 대변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계급의 구분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상체를 탈의한 그들 옆에 놓인 와인병은 세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만듭니다.
이 작품은 새로 출발하려는 웬디가 바닥부터 다시 다져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의사이면서 동시에 엑스 캐피털에서 관리자의 위치에서 직원들과 상담하는 그녀의 위치에 대한 모순을 이 그림에 빗대어 말하는 것일까요?
찰스의 옆에 배치된 작품은 포스트-인상주의 혹은 탈 인상주의 화풍으로 구분되는 조르주 쇠라의 작품입니다. 서커스 입구에서 열리는 사이드쇼의 장면을 매우 섬세한 점묘법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서커스가 돈을 받고 남들에게 기이한 장면을 보여 그들로 하여금 재미를 느낄 수 유도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돈을 내고 자신들의 흥미를 위해 서커스를 보러 갑니다. 그리고 단원들은 직업적 사명보다는 돈벌이 수단으로 유랑하며 서커스를 하지요.
서커스의 입구에서 진행되는 별도의 작은 쇼는 홍보 장치이면서 동시에 큰 웃음을 위한 준비운동을 위한 작은 쇼입니다. 드라마에서 찰스는 많은 인물들의 감성이나 이익관계를 교묘하게 조종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모두가 함정에 빠지는 판을 짜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됩니다. 물론 그의 부친에게 물려받은 능력이지요. 그런 인물과 <서커스 사이드 쇼>를 동일선에 배치한 카메라 앵글에 경의를 표할 정도입니다.
조르주 쇠라의 작품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하나의 장면을 재현했으나 그 재현 방식이 작은 점들을 무수히 많이 찍어서 표현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업사회에서의 많은 자본과 노동의 대가, 그리고 공장과 인간의 수작업에 대한 가치가 바로 이 작품에 담겨 있습니다. 1884년 제작된 <아스니에르의 물놀이 Bathers at Asnires> 역시 아름다운 자연에서 물놀이하는 여유로운 오후의 모습을 담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후경의 공장지대 설립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오후에 시간을 공허하게 보내고 있는 이들은 담을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당시 거대한 도시의 발전은 막대한 자본을 위해 설립된 공장은 인간을 기계로 대체했기 때문이지요. 작가는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점들을 일일이 직접 찍어가며 인간의 수작업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입니다.
드라마 속 인물들과 작품과의 관계를 보면 좀 더 재미있어지는데요. 뉴욕 주의 법무장관인 찰스가 매번 사람들과의 관계를 긍정 혹은 부정적으로 유지하면서 일을 진행하는 반면, 엑슬로드는 인간관계도 이용하지만 늘 막대한 비용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그리고 웬디 역시 엑슬로드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동시에 웬디에게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깨우치게 하는 인물로 나옵니다. 조르주 쇠라의 서커스가 찰스의 타고난 능력과 그의 계략에 말려드는 인물들을 상징한다고 본다면, 칼리보트의 그림은 노동과 돈, 계급사회의 관계를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칼리보트가 파리의 변화하는 모습이나 노동 계급에 대한 관심을 작품에 담았음에도 노동이 그 자체로서의 가치보다는 화폐로 측정되는 사회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또한 작가의 시선에서 이미 계급의 위치가 정해지는 듯하지요. 웬디의 옆으로 보이는 칼리보트의 작품은 자신의 삶을 새롭게 개척하는 의사 웬디를 은유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의사에 대한 강한 자긍심이나 봉사정신보다는 지식을 화폐로 교환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또 엑슬로드의 직원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겠네요. 칼리보트의 시선이 드라마 속에서는 엑스의 시선으로 대체되는 느낌입니다.
쇠라와 칼리보트의 작품을 나란히 보여주는 것은 찰스와 웬디의 부부관계를 직접 겨냥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두 작품 다 해당 시기의 새로운 미술사조의 등장을 알리는 작품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하나는 다른 하나를 탈피하려는 노력에서 탄생한 미술 운동이라는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웬디는 이제 찰스를 탈피하려는데요, 오히려 엑슬로드의 시각 아래 놓인 노동자가 되는 것은 아닌지 남은 에피소드를 마저 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