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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green Jan 14. 2021

[책] 『방랑자들』과 해부학에 대한 기록들

『방랑자들 Bieguni』

오늘은 201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Olga Tokarczuk)의 대표작 『방랑자들』(민음사, 2019)에 등장하는 해부학과 관련한 이미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방랑자들』은 2008년 폴란드 최고의 문학상인 니케문학상을, 그리고 2018년에는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소설인데요, 사실 이 작품은 읽기가 그렇게 수월하지만은 않습니다. 600여 장 가량의 방대한 분량도 독자를 압도하지만 특정한 한 명의 화자의 목소리로 어떤 사건에 대해 일관된 진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러 명의 화자들이 툭툭 튀어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술 방식 역시 몰입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거의 해체에 가깝게 파편화된 글들의 모음집으로 느껴질 만큼, 『방랑자들』은 많은 이들의 삶을 두서없이 담아내고 있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이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이야기를 쫓는 우리들 모두 그곳이 자기 자신의 내면이든 혹은 외부의 더 넓은 세상이든 어디론가 끊임없는 여행을 떠나는 방랑자들이라는 것, 그래서 이 책의 어느 갈피에건 우리의 여정을 자유롭게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방랑자들』의 많은 방랑기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해부학’에 대한 기록이었습니다. 작가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명한 해부학자 프레데릭 라위스(Frederik Ruysch) 박사의 수집품-교육적인 목적으로 방부 처리한 표본들의 컬렉션-을 역시 해부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다량으로 구입한 일화를 묘사하는데요, 특히 라위스 교수에 대한 다음 구절이 눈에 띕니다. 


“아드리안 바커르라는 이름의 화가가 남긴 그림을 보면, 고작 30대 초반의 나이에 도시 전역에서 가장 수준 높은 해부학 강의를 했던 라위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드리안 바커르 Adriaen Backer, <라위스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70

여기에 언급된 작품은 네덜란드의 황금기라 일컬어지는 17세기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했던 초상화가 바커르의 <라위스 박사의 해부학 강의>입니다. 왼쪽에서 세 번째, 모자를 쓰고 오른손에 해부용 칼을 들고 있는 인물이 라위스 박사로, 저명한 해부학자의 강의에 참석한 여섯 명의 외과의사들과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장면을 그리되, 참석한 각각의 인물을 모두 정교하게 묘사하는 단체초상화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나타난 고유의 형식입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 Rembrandt van Rijn,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로 네덜란드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렘브란트 또한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와 같은 작품을 남겼지요. 튈프 박사가 해부용 시체인 ‘카데바’의 왼팔을 해부하여 손가락을 움직이도록 하는 힘줄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의에 참석한 이들은 초상화가를 고용하여 수업을 듣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도록 했는데, 이를 통해 당대 해부학이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건전한 교양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드리안 바커르, <라위스 박사의 해부학 강의>의 세부
아드리안 바커르, <암스테르담 의학 협의회의 감독관들>, 1683

한편, 바커르의 <라위스 박사의 해부학 강의> 뒷편에 자리잡은 동상들은 각각 의술을 관장하는 신 아폴론과 그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입니다. 아폴론은 오른손에 예언서처럼 보이는 책을 들고 있고, 아버지로부터 치유의 힘을 물려받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왼손에는 뱀이 휘감고 있는 지팡이가 쥐어져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탈피를 통해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뱀의 존재를 신성하게 여겨 부활, 불멸, 치료 등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는데, 때문에 의학과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를 기리기 위한 이미지로 뱀이 선택되었던 것이지요. 바커르는 또다른 단체초상화 <암스테르담 의학 협의회의 감독관들>의 배경에도 이러한 도상들을 활용합니다. 창문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의술의 신인 동시에 궁술의 신이기도 한 아폴론이 커다란 활을 들고 있고, 오른쪽에는 아스클레피오스의 딸이자 건강과 위생을 주관하는 히기에이아가 서 있습니다. 화면의 오른편 벽에는 아스클레피오스를 상징하는 뱀이 휘감고 올라가는 지팡이가 그려져 있지요. 


<아스클레피오스>, 에피다우로스 고고학박물관 소장; <헤르메스>, 바티칸미술관 소장

여기서 잠깐, ‘아스클레피안(asklepian)’이라고도 불리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손에 쥐어진 ‘카두케우스(caduceus)’와 혼동을 일으키기도 하는데요. 위의 그림들에서 봤던 것처럼 아스클레피안이 뱀 한 마리가 지팡이를 올라가고 있다면, 카두케우스의 경우 뱀 두 마리가 꽈리 모양으로 지팡이를 감고 있습니다. 카두케우스는 전령의 신의 지물답게 지팡이 끝에는 날개도 달려 있지요. ‘뱀과 지팡이’라는 유사한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의학 단체에서 자신들의 로고로 아스클레피안 대신에 카두케우스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천상과 지상, 그리고 하계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역할을 맡은 바, 죽은 사람의 혼을 저승으로 안내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재생을 의미하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와 사자(使者) 헤르메스의 지팡이는 상황에 맞게 활용되는 것이 좋겠지요.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문득 궁금해집니다. 우리의 2020년, 그리고 우울함으로 가득한 어제와 오늘은 인류의 여행기, 『방랑자들』에 어떻게 기록될까요? 회색 빛이 감도는 이 어두운 여행길에서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건강의 신 하기에이아를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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