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고책 사연/ 이반 일리치
현시점에서, 책방쥔장의 사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반 일리치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의 일리치가 아니라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사상가이자 신부인 이반 일리치다. 일리치를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여전히 일리치가 잘 알려지지 않은 비주류 사상가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반 일리치의 사상을 열심히 전도한다고 생각하는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의 이희경 대표는 자신의 책인 <이반 일리치 강의>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반 일리치는 메이저 사상가가 아니라 마이너 사상가입니다. 하지만 아주 강렬한 팬덤을 가진 사상가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부터 책이 번역되고 소개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절판되곤 했어요. 그런데 머지않아 또 복간되더군요. 늘 어디선가 누군가는 반드시 이반 일리치를 다시 소환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반 일리치는 신기할 정도로 생명력이 긴 사상가입니다."
책방쥔장은 언제부터, 왜 일리치에 매료됐을까.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책방쥔장도 구체적인 시기와 이유가 궁금해 반추해보곤 한다. 이렇게 사상적 영향을 강력히 받은 사람의 책을 어떻게 알게 됐고, 어떤 지점에서 빠지게 됐을까. 그리고 그게 언제일까. 열심히 생각을 해봐도 뚜렷한 에피소드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특정 시점과 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일리치에게 서서히 빠져들었다는 생각만 남는다.
굳이 시작을 따지면 책방에 절판책을 모으는 과정에서 비롯됐다. 주관적으로 의미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오래된 중고책을 입고하는 것은 물론 이제는 국내에서 출판되지 않는 책을 헌책방 등에서 구해 책방에 들여놓는 재미에 한창 빠져 있을 때다. 여행을 가면 그 지역 소재의 책방을 들리는 것을 주요 일정으로 잡으며 절판된 책을 찾아다녔다. 언제고 꼭 구하고 말 것이라며 절판된 책 목록을 정리하던 중 <학교 없는 사회>라는 제목을 보게 됐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던 상식을 군더디기 없이 뒤집어 버린 제목은 강렬했다. 당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섹시하다'였다.
바로 인터넷에서 책을 검색했다. 이반 일리치라는 저자가 나왔다. 톨스토이의 책이 생각났지만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연관 검색어로 박홍규 교수가 떴다. 신문에 칼럼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박홍규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는 <이단아 읽기>는 언제나 빼먹지 않고 읽는 글이었다. 그런 박홍규 교수가 <학교 없는 사회>의 옮긴이로 나왔다. <이단아 읽기>에서도 이반 일리치를 다뤘다. 해당 글 마지막 문장에서 박홍규 교수는 "나의 영원한 스승"이라고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권력이나 자본과 거리를 두는 것은 물론, 도시나 아파트, 학교나 병원, 골프나 헬스, 자가용이나 방송, 외식이나 먹방, 핸드폰이나 인터넷 등등 지금 우리를 지배하는 허위의 주류적 일상과 거리를 두는 저항이 필요한 시대에 이반 일리치는 나의 영원한 스승이다."
칼럼 내용만으로는 부족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비주류 사상가쯤으로 이해했다. 짧은 칼럼은 일리치에 대한 궁금증만 키웠다. 박홍규 교수와 함께 연관 검색어로 뜬 사람은 이희경 대표다. <이반 일리치 강의>라는 책을 썼다. 이반 일리치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입문서 정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구매하고 읽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생각을 했다. 진보적인 삼관(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을 만들어 준 책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책방 이름에도 붙인 '불온'의 의미도 새롭게 다가왔다. 김수영 시인의 불굴의 자유 의지를 동경하며 마음에 담아뒀던 '불온'이라는 의미가 달라 보였다. 진보와 보수를 할 거 없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산업주의 자체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에 설렜다. 성장을 우선 할 것이냐 분배를 우선할 것이냐의 문제를 넘어 성장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기를 든 일리치의 사상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쳤다. 내가 본질을 놓치고 있었다,는 자각과 함께.
일리치의 책은 사상의 전환 또는 확장을 넘어 실생활의 변화를 이끈다.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용기를 동력으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일리치를 읽는다. 일리치는 성장중심주의를 비판하며 대안적인 삶으로 소박한 삶을 제시한다. 소박한 삶은 단순히 돈을 덜 쓰는 삶이 아니다. 역설적이기게도 궁핍이 아닌 충만의 삶으로 밀어낸다. 제도화되고 전문화된 소비문화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잊고 살던 스스로의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 나가는 삶으로 책방쥔장은 이해하고 있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운전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길 눈이 밝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책방에는 이반 일리치의 책이라면 능력이 되는 한 무조건 입고하고 있다. 당장 일리치의 책들이 팔리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책방쥔장이 공부를 하겠다는 욕심이 앞서는 마음이다. 다른 삶을 살고, 글을 쓰는데 일리치라는 더할 나위 없는 스승을 만났다. 또 하나 일리치가 더이상 비주류 사상가로 남아있지는 않는 사회가 오는데 책방이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 책방을 찾는 손님들에게 일리치의 책을 책방쥔장이 먼저 알고 말았다,고 소개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