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삶
"동시에 지우는 자신이 이 만화로 얻고 싶은 게 뭔지 자문했다. 이해 또는 용서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지만 너무 거창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인기나 인정이라 말하기에도 적절치 않아 보였다. '다 그리고 나면 알게 되겠지' 생각하며 지우는 손등으로 콧물을 훔쳤다."
김애란 작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다가 그냥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쓰기에 대한 글을 내가 쓸 자격이 되나,라는 생각에 미루던 글이다. 기자 생활을 10년 넘게 했다는 경력에 기대 '그래도 일반인보다 내가 글은 좀 쓰겠지'라는 어설픈 자존감을 갖고 브런치에 본격적으로 글을 올린 지 3개월 정도 됐을까. 패배감과 무력감을 감출 수 없다. 늘어나지 않는 구독자 수와 매번 구독자 수에도 못 미치는 '라이킷' 수는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나 아직 멀었구나! 그러면서도 또 글쓰기를 미루려 했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서 지우는 노가다를 하다가 잠깐 쉬는 시간에 자신이 온라인에 연재 중인 만화 <내가 본 것> 2화에 대한 반응을 살핀다. 별다른 댓글을 찾지 못한 지우는 문득 자신이 왜 만화를 연재하는지에 대해 파고든다. 딱 떨어지는 답을 찾지 못한 지우는 머리 굴리는 짓을 멈춘다. 그리고 "다 그리고 나면 알게 되겠지"라며 머릿속 생각을 훌훌 날려버린다. 딴생각 말고 연재나 계속 올리자, 쯤으로도 이해된다. 어떻게 보면 지우가 치열하지 못해 무력해 보일 수 있고, 목적의식도 또렷하지 않은 일에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우의 저 생각과 행위에서 글쓰기에 대한 부인하기 어려운 통찰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글쓰기 대가들이 비슷하게 말해온 통찰이다.
"언제나 훌륭한 책은 작가보다 더 지적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작가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지요. (생략)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텍스트가 작가보다 더 똑똑해요. 때로 텍스트는 작가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생각을 암시하기도 한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계간 문예지인 '파리 리뷰'가 엮은 인터뷰집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첫번째로 등장하는 인터뷰이는 움베르트 에코다.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은 장강명 작가의 말처럼 '풀네임을 다 적지 않아도 되는 문호(文豪)급 소설가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이런 책의 1번 타자로 나온 움베르트 에코는 글을 쓴 작가보다 작가가 쓴 글 자체가 더욱 '똑똑하다'고 말한다. 탁월한 작품들은 작가가 쓰기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담고 있다는 의미로 와닿는다. 쓰기 전에 완벽히 구상해 놓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그냥 쓰면 비로소 반짝이는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말로도 읽힌다. 훌륭한 소설은 독자들로부터 더 풍요로운 이야기를 나을 수 있고, 작가가 의도하지 못한 철학과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단편소설 <혼모노>에 대한 성현아 평론가의 해설을 읽고 이런 생각을 더욱 굳혔다.
"노력한 자가 그 대가로 능력을 얻고 이를 인정받아 차등적으로 대우받게 된다는 이 접근법은 노력한다고 해서 누구나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은폐한다. (생략) 문수가 대결하려는 대상이 신애기도, 장수 할멈도, 굿판에 모인 사람들도 아닌, 현존하는 자신을 가로막고 침묵하는 불합리하고도 불명확한 세계일 때, 그는 오히려 가벼워진다."
성현아 평론가는 <혼모노>의 해설인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에서 능력주의 은밀한 진실과 알베르트 카뮈의 부조리 등을 소설에 연결시킨다. 개인적으로 소설보다 해설에 더욱 감탄한 대목이다. 해설을 읽고서야 소설의 가치가 또렷해졌다. 이야기 전개에 빠져 무심히 지나쳤던 문장들이 해설로 인해 강렬히 살아왔다. 소설을 쓴 작가는 정말 이런 의미와 철학을 미리 염두하고 이야기로 풀어냈단 말인가! 감탄하며 의심했던 기억이 난다.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지라는, 내겐 너무나 신박한 화두를 던져줬던 이성복 시인의 글쓰기 통찰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문학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생각하고 고민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써질 수밖에 없어 쓴다는 그런 말을 한다. 이성복 시인과 비슷한 말을, 찰스 부코스키는 <글쓰기에 대하여>에서 더욱 모질게 말한다. 속에서 쓸게 튀어나오지 않고 머리 굴리고 있다면 작가 때려 치우라고. 결국 통찰들을 모아보면 잔기술로 좋은 글 쓰려고 애쓰지 말고, 매일 같이 글쓰는 근육을 키우라는 거, 머리 싸매고 앉아만 있지 말고 당장 노트북을 켜던지 연필을 잡으라는 거다. 그래서 쓰니 이렇게 오늘도 하나 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