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하다
“No book is genuinely free from political bias.”
— 조지오웰 <왜 나는 쓰는가(Why I Write)> 중
얼마 전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책방에 인터뷰를 하러 갔다. 주민자치회에서 마을신문을 만드는 일을 맡았고, 동네에 있는 책방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싶어 책방지기를 섭외했다. 인터뷰는 준비한 대로 잘 마무리했고, 책방을 나오면서 책 하나를 서둘러 검색했다. 책방지기가 나중에 진행할 필사모임에서 첫 책으로 다루고 싶다며 꼽은 책인데, 기억 날듯 말듯한 저자의 이름과 아리송한 책 제목이 호기심을 유발했다.
인터넷에 검색된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윤가은이 그 윤가은이었다. 최근에 가장 보고 싶은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세계의 주인>을 말할 거 같은데, 감독이 윤가은이다. 아...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것 만으로도 책에 대한 호감도는 급상승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책 제목인 <호호호>는 손을 가리며 수줍은 듯 또는 진심으로 재밌고 기쁠 때 나올법한 웃음소리를 말하는 거였다.
주저하지 않고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았다. 생각대로 책은 술술 읽혔고, 저자와 덩달아 '호호호'하게 만드는 대목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윤가은 감독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사적인 경험과 감정을 꾹꾹 눌러 담겼고, 표지와도 같이 푸근하면서도 소소한 이야기들을 친구와 수다떨듯 털어놓았다. 다만 공부하듯 자세를 고쳐 잡고, 필기도구를 갖춘 상태에서 눈에 힘을 주고 뇌를 풀가동해 책을 읽는 나의 독서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책이었다.
그래서 <호호호> 읽으며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가로운 시간에 소파에 누워 혼자 킥킥 거릴 수 있게 만드는 책이랄까. 그렇게 나른하고 느슨하게 책을 읽어가다가, '덜컥' 한 문장에서 마음이 걸렸다. 빠르게 활자들을 이동하던 시선은 그 문장에서 옴짝달싹 못했다.
"어쩌면 뭔가를 잘못 말할 기회 자체가 사라진 것도 같았다."
이 문장은 저자가 영화 이름을 잘못 말했던 에피소드에서 길어 올린 생각이었다. 이 문장에 묘하게 마음이 갔다. 이 문장이 안 쓰여있었다면 저자가 실수를 했던 경험을 나 역시 '호호호'하며 스치듯 읽고 지나갔을 거 같다. 이 한 문장 때문에 저자의 경험이 쓰인 부분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었다. 그리고 다시 이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정치적인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느낌을 '섹시하다'라고 표현해 왔다는 걸 오랜만에 떠올렸다. 기존 질서에 당차게 반격을 가해, 보는 이를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불온함, 일상적인 생활에서 은근히 모습을 드러내는 알듯말듯한 권력관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향해 던지는 뜬금없지만 본질적인 질문, 솔직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기에 베어나는 예리한 문제의식 등이 나에게는 섹시했던 것이다. 이런 섹시함이 엿보이는 책을 읽어 왔고, 그런 섹시함을 담아낸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 나였다.
<호호호> 덕분에 다시 글을 쓸 동력을 얻은 거 같다. 대단한 글을 써야 한다고 끙끙대며 정작 글을 못 쓰고 있었다. 윤가은 감독에게 노래방이, 다시 영화에 매진할 수 있는 에너지를 채워줬다면 나에게 <호호호>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되살려줬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그냥 솔직히 쓰자! 쓰고 싶은 마음 자체로도 써야 하는 글을 쓰자! 이 글로 뭘 해보겠다는 생각을 아예 버릴 수 없겠지만 조금은 내려놓고 쓰는 걸 즐기자! 그럼 뭐라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안 한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내가 잘할 수 있는 거 같다! 관심이 가니까 좋아하는 마음이고, 그래서 사소하고 풋풋한 글 속에서도 정치적인 뉘앙스를 포착하는 거다! 이게 내가 좋아하는 거고, 남들보다 조금은 발달한 특성일 테다! 이걸 쓰자! 섹시하게!
글을 마치려 보니 한 가지 생각이 더 든다. 생각해 보면 내가 주민자치회 활동을 하게 된 이유도 다른 일로 주민센터에 들렸다가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는 분의 말 한마디 때문이다. 그의 말속에서 정치적인 뉘앙스를 포착하고 끌렸다.
"그거(주민자치위원 활동) 서로 싸움만 하고 지긋지긋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