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에이션 루트를 시작한 장면
마음을 다잡으려고 산에 올랐다. 혼자 오르고 싶은 마음에 누구도 부르지 않았다. 아무말도 안 하고 그냥 오르면 뭐든 생각이 정리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초입에서는 산에 오르려는 다른 사람들이 보인다. 슬슬 다리에 피로감이 올 때부터는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산속에 잘 정돈된 사람의 길을 따라가니 한 눈을 팔 마음의 여유가 있다. 숨이 찰 무렵부터는 발을 내디딜 땅으로 시선이 떨어진다. 오르내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공간이 눈에 들어와 잠시 쉰다. 대충 엉덩이를 댈 만한 곳에 걸터앉아 물을 마신다.
뚜껑을 닫은 물통을 가방 옆에 꽂아 넣는다. 무릎을 피고 일어나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멘다. 고개를 들어 나아갈 길을 바라본다. 아직 정상까지는 멀었다. 그대로 그 길을 오를 것인가?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소설 속 주인공은 방향은 틀었다. 길이 아닌 곳으로 몸이 더 반응하고 있다는 걸 느꼈을 테다. '문득 눈을 돌리자, 길옆의 나무숩은 어슴푸레하고 조용해서 마음이 편해졌다. 숲 안쪽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주인공은 보고야 말았다.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곳에서만 볼수 있는 것들을. '어스름 속의 나무와 풀은 숨죽인 것처럼 고요했다. 옅은 잿빛 수목, 빨간색과 황갈색 낙엽, 땅을 기는 나무뿌리, 시커먼 부엽토, 그것들을 떠받치는 지표면에 아롱진 햇빛이 흔들렸다.'
<페펙트 데이즈>의 그 코모레비였을까?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살아있듯 흔들리는 아롱아롱한 햇빛. 주인공이 보고말았던 것들은, 주인공을 비로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고야 말았다. '손을 뻗어 소귀나무의 거무스름한 가지를 치우고 반발짝 들어가보았다. 잠시 있으니 한 덩어리로 보였던 나무들이 신기하게도 성글어 보였다.'
이거 생각보다 할 만 한데. 용기일 수도, 자신감일 수도, 안도감일 수도 아니면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일 수도. 다른 쪽으로 몸을 움직이니 이 쪽도 길이 될 수 있음을, 어쩌면 이 쪽이 진짜 길이었을 수도 있음을 주인공은 어렴풋이 맛을 보았던 거다. 이제 막 맛을 봤기에 그래서 아직은 움츠려 들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받아들이면서. '몸을 비틀거나 웅크리면 나무들 사이로 못 지나갈 것도 없을 듯했다. 하지만 저 안쪽은 어떨까. 메가 씨는, 그 사람은 늘 이런 곳만 지나다니는 걸까.'
소설 <베리에이션 루트> 84페이지를 읽으며 안 쓸 수 없어 썼다. 주인공은 이 장면에서부터 인생의 베리에이션 루트를 걸어나갈 테다. 기존의 것을 변형시킨다는 뜻을 가진 베리에이션에, 등산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루트를 붙인 소설 제목은 '다른 삶'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거 같다. 그것도 아주 평범하고 소시민적으로 가볍게. 하지만 담고 있는 의미는 묵직하게.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인해 바뀌지 않는다. 자기가 겪고 느껴고 아파야만 삶의 전환점을 만난다. 우선은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할 테고, 텀이 얼마가 됐든 몸을 움직여야 드디어 방향을 튼다. 그래서 사람 됨됨이에 경로의존성을 갖다 붙이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무난했던 일상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주인공은 혼자 산을 올랐고 거기서 몸을 한번 틀어봤다. 이제 그 맛은 봤을 테고...아직 소설을 읽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