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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사랑하기 위해, 너를 사랑하지 않아

제이씨의 인류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by 돈태

"지금 가장 고민이 무엇인가요?"


책방 주인이 제이씨에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제이씨는 얼마 전 술자리에서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참 남일에 관심 없어."

천천히 입을 뗀 제이씨는 "제가 지금 하는 일이 누구보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야 하는데, 실은 제가 다른 사람 이야기에 너무 관심이 없거든요"라고 답했다.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제이씨는 지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친구들끼리 했던 이야기를 누구보다 빨리 잊었다. 지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딴생각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매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글로 옮겼다. 평소 눈여겨봤던 책방에서 상담 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에 신청해서 갔는데, 책방 주인의 질문에 제이씨는 이 같은 고민을 처음 입 밖으로 꺼냈다.


제이씨의 이 같은 고민은 자신의 가치관을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정말로 공익을 위한 삶을 원하는 건가?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의 제이씨는 나름의 지표를 설정해 두고 있었다. '사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살겠다'는. 이런 지표를 마음속에 품고 향후 진로를 고민한 결과, 기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막판까지 경합했던 직업은 시민단체 활동가였다. 제이씨는 두 직업을 놓고 현실적인 상황을 면밀히 따져 기자로 마음을 굳혔다. 당시 제이씨는 공익을 위해 살면서도 어느정도 경제적인 생활이 가능해야 한다는 논리를 구축했다.


제이씨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추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 같은 괴로움에 시달렸다. 공익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걸고 사익을 추구하려는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


뉴스가 될만한 목소리에는 온 신경과 정신을 집중하면서도 너무나 평범한 개인들의 목소리에는 철저히 곁을 내주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고 싶다'는 정의감을 되새기면서. 그럴수록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다. 공익적인 활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보상 심리 또는 일종의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싶은 욕망 등이 음흉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고 자책했다.


공익을 추구하면서도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에 공감하는 자신이 무서웠다. 제이씨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헷갈렸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한 신념 역시 본래의 자기가 아니라 그리해야만 했던 것이기에 그리했던 신념이라는 허무함을 자각하며 욕망을 직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제이씨는 자신의 본성을 위선과 선민사상으로 규정하는데 이르렀다. 권력을, 상대적 우월함을 손에 쥐기 위한 선의. 흉측하고 더러운 자신의 본성에 낙담한 제이씨는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자신은 사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문제적인 본성을 지녔기에 사회적으로 고립돼야 한다고.


괴롭지만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제이씨는 사표를 썼다. 다시는 공익을 위한 삶을 산다는 거짓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사회 문제를 정의의 심판자처럼 비판하는 자신이 꼴사납기도 했다. 이제는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런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 적어도 자신을 속이며 살지는 말자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정하면서. 인간적이지 못한 본성을 인정하고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고 살자는 심정으로.


백수의 제이씨는 어느 주말. 예기치 않은 찰나의 위안을 받았다. 고전을 읽어보자는 의무감 비슷한 감정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졸린 눈을 비비며 읽던 중이었다. 책에서 실천적 사랑을 해보라는 장로의 조언에 불편한 진실을 토로한 부인, 그런 부인에게 다시 장로가 공감하며 들려준 한 의사의 이야기를 읽는 순간 제이씨는 잠이 확 깨며 감탄했다. 이거 내 이야기인데. 내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게 인간 보편의 본성일 수 있겠구나.




"인류를 사랑하긴 하지만 스스로에게 놀라곤 한다고 말하더군요. 인류 전체를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인 사람들, 즉 사람들 개개인은 점점 덜 사랑하게 된다고 말입니다.---개별적인 사람들을 더 많이 증오하게 될수록 언제나 인류 전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더욱더 불타오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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