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j씨/ 감기 걸리기 좋은 날
j씨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잠들기 전 몸이 으스스하고 머리가 묵직하게 무거웠다. 몸살이 나려나 걱정됐다. 편의점에서 산 쌍화탕을 컵에 따라 전자레인지에 데워 마시고 잠을 잤다. 침대에서 일어서는데 몸이 한결 가벼웠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 살짝 있긴 했지만 몸 상태가 나아진 거 같았다. j씨는 눈을 비비며 화장실로 가 얼굴을 씻었다. 몸이 괜찮으니 좀 걷자고 생각했다. 최대한 편한 바지를 꺼냈다. 경량 패딩을 놓고 고민하다 꺼냈다. 일교차가 심한 요즘이다. 몸 상태가 불안하다. 걷다가 덥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단단히 입고 나가기로 했다.
사실 j씨는 어제 잠들기 전에 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내일 목돈이 필요했다. 미루고 미루던 갚어야 할 돈이다. j씨는 자신이 있었다. 당장 수중에 현금은 없지만 코인과 주식에 들어가 있는 돈이 있었다. 어느정도 수익률을 보고 있던 터다. 최근 자산시장 상황이 그닥 좋지 않지만 다시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가장 수익률이 좋은 코인에서 돈을 빼면 된다고 위로했다. 잠든 새벽 사이 미국 코인시장이 회복할 것이란 기대를 걸고 현재 거래되고 있는 가격보다 높은 가격대에 매도 물량을 걸어놓고 잠을 청했었다.
j씨는 잠결에 핸드폰 진동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매도를 걸어놓은 물량이 체결됐다는 알림으로 생각하며 다시 잠들었던 거 같다. j씨는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서기 직전에 코인 시세를 확인하는 앱을 열었다. j씨는 눈을 의심했다. 그야말로 폭락이다. 분 단위로 그래프가 그려진 코인 시세는 굴곡 없이 수직낙하를 그렸다. "후." j씨는 한숨을 쉬며 코인거래소 앱을 열었다. "휴." 걸어놨던 매도 물량은 새벽에 체결된 상태를 확인하고 안도했다. 새벽동안 코인 가격은 j씨가 매도를 걸어놨던 가격 대를 스쳐 지나간 후 급락했다.
집을 나와 걸으며 j씨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래도 폭락 전에 거래가 체결돼서 다행인데 이번 급락은 심상치 않은 느낌이다. 그간 떨어졌다 올랐다를 반복하면서도 가격이 어느정도 지지선을 지켰다. 그런데 오늘 가격은 그 지지선을 뚫고 내려갔다. 며칠 내 현금이 또 필요한 상황이다. 이번에 가격에 회복되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이 커지려는 순간 j씨는 걸음을 멈췄다. '이거 기회인가.'
j씨는 지난 몇 달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코인을 공부했다. 코인시장에 대한 어느정도 확신을 갖게 됐다. 한 방을 노리는 듣보잡 코인보다는 비트코인을 중심으로 투자를 하는 중이다. 이번 급락이 다시 오지 않을 저가매수 기회라는 직감을 느꼈다. 다시 걸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코인을 매수할 자금을 구할 길이 여의치 않았다. 얼마 전 코인시장이 좋을 때 일부 현금화해서 대출금 일부를 상환했다. j씨는 아쉬웠다. 그때 상환하지 않고 현금을 들고 있었으면. 순간 한 줄기 빛이 스쳐지나가는 거 같았다. 그럼 상환을 한 만큼 대출 한도가 남아있는 거 아닌가. j씨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대출을 받은 은행 지점이 문을 여는 시간을 확인했다.
j씨의 생각은 안일했다. 상환한 만큼은 다시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대출 담당자는 까다로웠다. 현재 소득을 묻는 말에 퇴직했다는 말 대신 "없다"고 답했다.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냐는 물음에는 최근 폐업했다는 말 대신 "아니"라고 했다. 대출자금 용도를 묻는 말에는 생활자금이라고 말했고, 담당자는 사업자금이 아니면 한도가 낮을 것이라고 말했다. j씨의 답을 종합한 결과, 담당자는 추가 대출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미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판단을 j씨에게 알렸다. 담당자는 심사를 진행해 보고 오늘 오후 또는 내일 오전 중에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j는 덤덤하게 "알겠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행을 나온 j씨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욕심 내면 될 것도 안된다,고 어디선가 들어봤을 진부한 격언을 떠올렸다. 그럴수록 기회라는 직감은 확신처럼 다가왔다. '연락해봐, 말어.' 핸드폰 전화번호부에서 '엄마'라는 단어를 누른 후 화면에 뜬 전화번호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신세를 져보자.' 몇 번 통화음이 가고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집이에요?"
"응 왜."
"아니 점심때쯤에 잠깐 집에 좀 가려고."
"그래 와. 근데 뭐 할 얘기 있어?"
"응 조금. 아버지는 집에 있어요?"
"응. 점심 먹으러 왔다가 다시 나갈 거야."
"네. 이따 갈게요."
"그래."
j씨는 부모님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핸드폰에서 넷플릭스를 켰다. 이어보던 드라마인데 집중이 안 됐다. 집에 도착하면 엄마에게 어떻게 말할지 머릿속이 번잡했다. 아버지가 안 계실 때 엄마에게만 돈을 빌려달라고 말하고 싶다. 당장 돈이 좀 필요한데 금방 갚을 테니 조금만 빌려달라고 할까. 아니면 좋은 투자 기회가 있는데 대출을 받아달라고 할까. 대출을 받으면 이자는 매달 주고 연말에 원금에 조금 더 보태서 주겠다고 약속할까. 이거저거 고민하지 말고 그냥 솔직히 말할까. 당장 돈이 좀 필요한데 코인에 들어간 돈을 지금 빼기가 아깝다고. 그리고 지금까지 공부한 바로 오늘 가격은 코인에 투자하기 좋은 기회라고. 머리를 굴릴수록 j씨는 스스로 궁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떳떳하지 않다는 느낌도 그렇고, 그간 주변에 아들 자랑을 많이 했던 엄마를 생각하니 돈을 빌려달라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 같았다. 괜히 욕심 내지 말자는 생각이 다시 꿈틀대며 발길을 돌릴까 했지만 어느새 집 근처에 왔다. 오늘은 놓치기 아까운 날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집에 들어가기 전 아버지는 점심을 먹고 다시 나갈 거라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집 근처 편의점에서 음료수 하나를 사서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이쯤 되면 아버지가 집에서 나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향했다. 혼자 집에 있을 엄마에게 솔직히 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코인에 들어간 돈이 조금 있는데 지금까지 수익률이 괜찮고, 당장 쓸 돈이 필요한데 빼기 아깝다고. 엄마가 여윳돈이 있으면 지금 코인을 저가매수할 찬스라고. j씨는 코인거래소에 들어가 있는 투자금을 늘릴 생각을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 소파에 아버지가 앉아 있다. 생각 못한 동생까지 있다. j씨는 다시 안일했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는 "밥은?"이라고 말했다. 동생은 오늘 오후 근무라고 했다. j씨는 아무렇지 않게 "밥 먹었지. 근처에 왔다가 왔어요"라고 말했다. 설거지를 하던 엄마는 거실 쪽으로 오며 "무슨 얘기하려고"라고 말했다. 아버지와 동생은 과일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다. j씨는 "요즘 이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데, 좀 쉬었다 가려고"라며 소파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부엌으로 갔던 엄마가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왔다. j씨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j씨는 어렵게 입술을 뗐다.
"아니. 우리 이사를 생각하고 있어요. 연말에는 가려고. 부동산에 집 내놨어요."
j씨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올해 연말쯤에는 투자자산이랑 현재 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가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 회사에 사표를 쓴 아들을 보며 부모님도 어느정도 감은 잡고 있을 j씨의 계획이다. 엄마는 "어디로 가려고"라고 물었다. j씨는 "지방 쪽으로요. 이미 집을 본 데가 있어"라고 답했다. 동생은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나갈 준비를 했다. 아빠는 TV에서 나오는 뉴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금 집 대출금은"이라고 물었고, j씨는 "모아둔 돈이 조금 있고, 이사 갈 집은 지방이라서 싸요"라고 답했다. 엄마는 "그쪽 학교는 괜찮아"라고 다시 물었고 j씨는 "근처에 학교 있는데 애들 다니기 좋아요"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소파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며 "그래. 이제 네가 알아서 하면 되지"라고 말했다. j씨는 "요새 부동산 거래가 잘 안 돼서 일단 내놓고 보려고요. 그냥 알고 계시라고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버지와 동생은 집을 나갔다. 엄마와 j씨 둘만 집에 남았다. j씨는 부엌으로 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셨다. 잠깐 부엌에 서있는데 머릿속이 또 복잡하다. 엄마한테만 말해 볼까. 엄마는 거실 소파에 편히 누워 TV를 보고 있다. j씨는 거실 쪽으로 가다가, 몸을 틀어 현관문 옆 있는 작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금 눈좀 붙이고 갈게요."
"그래. 거기 침대 위에 이불 있으니 덮고, 문 닫고 좀 쉬어."
"네."
j씨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며 '잘했어'라고 생각했다. 나이 마흔 넘어서 엄마한테 손을 벌리려고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집에 오면서 조금 뻔뻔해지자고 생각했던 스스로를 후회하며 안도했다. 그래 당장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 쫄려서 마음이 약해진 거 같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 코인 가격은 다시 오지 않을 싼 가격이라는 미련은 여전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j씨는 예전 직장 동료들이 나오는 꿈을 꾸다 깼다. 1시간 조금 넘게 잠이 들었던 거 같다. 거실로 나오니 엄마는 여전히 편한 자세로 TV를 보고 있다.
"왜, 더 자. 시끄러워서 깼어?"
"아니. 잘 잤어요. 이제 가야지."
"어디로 가는데?"
"이제 집 쪽으로 가야지."
j씨가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싣는데 엄마가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j씨는 "갈게"라고 말하며 문을 열었다. 뒤에 서있는 엄마는 "고민할 게 많겠네 아들. 잘 가고"라고 말했다. j씨는 고개를 들어 엄마 얼굴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역시 핸드폰의 넷플릭스가 j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j씨는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평일 오후 한적한 지하철 안에서 멍하니 앉아서 왔다. 집 근처 역에 도착하니 허기가 밀려들었다. 머리도 갑자기 지끈거렸다. j씨는 집 근처 분식집에 들어가 김밥을 한 줄 먹고,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아이스아메리카노 빅사이즈를 시켰다. 찬 커피를 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j씨는 오늘 카페인을 먹지 않아서 머리가 지끈거렸나,라고 생각했다. j씨는 커피숍 앞 도로가로 나와 담배를 한 대 폈다. 바람이 시원했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데 답답하던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j씨는 혼잣말로 "잘했어. 궁색하게 욕심내려고 했어. 그만 생각하고 쓰던 글이나 다시 쓰자."
커피숍으로 돌아와 오전에 못 본 기사들을 살폈다. 평소 기사에서 글감을 많이 찾는다. 오늘은 기사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들었다. j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해서 소설 형식의 글로 옮기고 있다. 이런 글을 쓰면서 j씨는 '논픽션 노블'이라는 장르도 붙였다. 자신이 생각해 낸 조어가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며 만족했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미 쓰이는 개념이고 단어였다. j씨에게 실망보다 자신감을 준 발견이었다. 핸드폰으로 기사를 훑는데 '‘어른 김장하’ 장학생 문형배, 자폐아 키우며 세상 이해한 김형두'라는 제목에 눈에 들어왔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탄핵 관련 기사가 쏟아지는데 김장하 선생님이랑 헌법재판관이랑 연결을 한 제목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기사에서 문형배 재판관이 과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했던 발언을 읽으며 j씨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눈물이 나올 거 같은 것을 꾹 참았다. j씨는 다시 속으로 '오늘 정말 잘했어'라고 되뇌었다.
청문회 당시 그의 재산은 6억7545만원으로 신고됐고, “너무 적은 거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문 권한대행은 “제가 결혼할 때 다짐한 게 있다.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며 “최근 통계에서 (우리나라) 가구당 평균 재산이 한 3억원 남짓 되는 거로 아는데 제 재산은 (아버지 재산을 제외하면) 4억원이 조금 못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평균 재산을 좀 넘긴 거 같아 반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