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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밤

집으로 가는 길

by 돈태

석영이 형은 술잔에 담긴 소맥을 단숨에 들이켰다. 우리는 형을 쳐다만 봤다. 만희가 석영이 형의 빈 잔을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 석영이 형의 잔에 소맥을 채운 후 말없이 잔을 건넸다. 석영이 형은 잔을 받아 역시 아무 말 없이 다시 잔을 비웠다. 소맥이 석영이 형의 목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우리 귀에까지 울렸다. 석영이 형은 갑갑했던 넥타이를 풀어헤치듯 거칠게 잔을 비워댔다. 연속해서 3잔을 비우는데 성우가 “후래주 석 잔은 나로 족하는데”라고 작게 말하며 눈치를 살폈다. 딴에는 유머였는데 주변은 사늘했다.


“나 말 좀 해도 될까?”


석영이 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동의를 구한다기보다는 조용히 하고 내 얘기를 들어봐,라는 뉘앙스였다.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던 석영이 형이 고개를 들어 우리를 번갈아 봤다. 테이블 위의 노란 불빛이 형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래서 내가 회개하고 있어... 탐욕스러웠지. 악마가 내 안에 깃들면서 선을 넘어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어. 자본주의를 욕하면서 너무나 자본주의적이었네. 그런데 그 다단계라는 회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 비록 실패했지만 그 본질적인 정신은 이어가야 해. 자본주의라는 탐욕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석영의 형의 말은 느린 만큼 무거웠다. 덩달아 테이블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석영이 형이 쓰는 단어들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는 느낌도 불현듯 들었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회개’, ‘악마’, ‘탐욕’이라는 말을 내뱉는 형의 얼굴에서 순고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형이 말한 '본질적인 정신'은 최상위 리더가 말했던 자본주의에서 '노예의 길'로 들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겼다는 것을 나는 직감했다.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돈에 미쳐 돌아가긴 하지...”


석영이 형이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가 곧바로 자기 앞에 놓여있는 빈 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균봉이 무심하게 석영이 형의 잔에 술을 채웠다. 석영이 형은 채워지는 잔을 무표정하게 바라만 봤다. 잔이 채워지자 석영이 형은 아무 말 없이 또 술을 비웠다.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은데 사람들이 잘 몰라. 그래서 세상이 암흑 같아서 두려워.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야. 양심도 팔아먹고 이웃도 친구도 없어. 온통 남의 것을 탐하고 도둑질하는 세상이야. 이런 세상에서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온갖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부도덕한 사람들이 권한을 행사하는 사회에서... 우선 나부터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 술도 끊고.”

나는 석영이 형의 말들이 점점 불편해져 갔다. 단어 사용에서 오는 어색함을 넘어 형이 전개하는 생각들이 너무나 한쪽으로 기울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갈라놓는 듯한 말들에는 울분 같은 억눌린 감정이 배어 있었다. 석영이 형이 한숨을 내쉬는데 균봉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균봉은 나와 같은 불편함을 참지 않았다.

“깨끗한 상태가 뭔데...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이야. 그럼 술 마시는 것도 악이야... 아우 씨... 머리 아파.”


균봉은 습관처럼 말끝에 욕을 붙이려다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번엔 만희가 균봉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였다. 균봉이 어깨에 손을 살짝 얹은 만희가 입을 열었다.

“형 다단계 얘기한 건 미안해. 내가 좀 흥분했어. 그런데 형. 세상을 너무 암울하게만 보는 건 아니야? 그래도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잖아.”

균봉이 어깨에 있는 만희 손을 툭 쳐서 떨군 다음 말했다.


“야. 그만해라. 술 좀 마시자. 씨발.”

성우가 테이블에 있는 빈 잔들을 자기 앞에 모으며 균봉의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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