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카페에서
카페의 공기는 저녁 빗방울 직후의 묘한 눅눅함을 머금고 있다. 유리문 바깥으로는 회색빛 도시의 사선들이 보이고, 그 선 사이로 희미한 네온사인의 색들이 물감처럼 번진다. 카페 안쪽은 따뜻한 전구빛으로 채워져 있는데, 둥근 구형 조명들이 줄에 매달린 행성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유리문 옆 키오스크 앞에 검은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다. 약간 비스듬히 서있는 모습에서 추측 건데, 그는 화면을 응시하며 손끝을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다. 어떤 망설임이 연상되는 뒷모습이다. 원래 생각해 둔 메뉴가 없었을 수도 있고, 화면에 나온 메뉴들로 인해 원래 생각을 수정할지 고민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바깥의 전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그의 마음에도 결정하지 못한 무언가가 얽혀 있는 것은 아닐까.
왼편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서는 일상의 피로감이 느껴진다. 갑옷 같은 정장, 무게를 이겨내고 있는 듯한 두꺼운 어깨.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인 남자에게서 체념마저 연상된다면 무리일까? 뒤통수 위로 쏟아지는 는 조명은 그의 고단한 하루를 은밀히 드러내는 듯하다.
매대 위엔 핑크빛 머그잔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색감은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다. 냉장 진열대엔 케이크들이 반짝이고, 예상되는 달콤함은 격리돼 있어 공허하다. 바깥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오토바이 한 대와 주황색 안전콘은 평온한 카페의 내부와 도시의 거친 리듬을 분리하는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강남역에서 잠깐 시간을 보낼 곳을 찾아 들어온 카페는 '예상 밖의 쉼'이 아니라 '일시적인 피신처'일지도 모른다. 커피 향이 감도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침묵 속으로 숨어들고, 나는 그 침묵들을 눈여겨보며 침묵하고 있다. 같은 시간은 바깥에서 계속 흐르는 데, 이 안에서는 잠시 멈춘 걸까? 다시 시간이 흐르는 곳에 접촉하기 위해 잠시 벌어졌던 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