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함에 옹졸하게
속초에서 예정 없던 1박을 하게 됐다. 이참에 마음 편히 술이나 마시기로 했다. 바다가 있는 속초 아닌가! 회에 소주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마침 숙소도 항구 근처였다.
숙소에서 걸어서 몇 분 안 되는 식당에 들어갔다. 온라인에서 맛집으로 소문이 난 해산물집이다. 이른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을 수 있었다. 풍경도 그렇고, 안주도 그렇고 마음은 들떴다.
대표 메뉴인 해산물 모둠을 시켰다. 활어회도 조금 나온다는 점이 끌렸다. 술이 먼저 나왔다. 벌써 입 속에 침이 고였다. 빈속에 소주를 들이켰다. 캬. 싸하게 속을 덥혀 주는 이 느낌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기본안주가 테이블에 올라왔는데 별거 없다. 한 잔 더 빈 속에 욱여넣었다.
문득, 1회용 비닐 식탁보를 깔아놓은 테이블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 안주와 술병 그리고 술잔 등을 놓으니 메인안주를 놓을 자리가 애매해 보였다. 비어있는 옆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안 남은 기본 안주들을 한 곳에 모으고 빈 접시들을 옆 테이블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메인안주가 놓일 공간이 충분해졌다.
메인안주가 나오고 술을 더 시켰다. 빈 병도 옆 테이블에 올려놨다. 종업원이 쉽게 가져갈 수 있도록 눈에 잘 보이게 놔뒀다. 종업원은 아직 옆 테이블에 올려놓은 접시와 빈병을 눈치채지 못한 거 같았다.
메인안주가 기대만 못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다른 안주를 하나 더 시켰다. 이 식당을 소개하는 온라인 글들에 자주 언급됐던 골뱅이 무침이다. 아차차! 시켜놓고 보니 깜박했다. 오이를 빼달라고 해야 하는데. 얼른 종업원이 있는 쪽으로 갔다. 종업원 한 명이 서빙카트 위에 놓인 생선구이를 점검? 하고 있었다. 이 식당의 주방은 한 층 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은 덤웨이터에 실려 올라오는 구조다.
"저기... 방금 골뱅이 무침을 시켰는데 혹시 오이 들어가나요?"
생선구이가 담긴 접시를 들여다보고 있던 종업원은 고개를 들어 "네. 들어갑니다"라고 말했다.
"아... 그러면 오이 빼주세요."
종업원은 나를 잠시 바라봤다. 그리곤 생선구이가 담긴 접시를 한번 내려다본 후 다시 고개를 들며 혼잣말 비슷하게 말했다. "후... 그럼 아래 내려가야 하는데..."
난 아무 말 없이 종업원을 바라봤다. 잠시 후 종원업은 손에 들려 있던 행주를 서빙카트 위에 내려놓고 계단 쪽으로 아무 말 없이 갔다. 나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잠시 본 후 자리로 돌아와 소주를 한 잔 들이켰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종업원이 골뱅이 무침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남은 메인안주를 모아 기본안주 접시에 옮기고 메인안주 접시를 옆 테이블에 올려놨다. 골뱅이 무침이 쉽게 테이블에 놓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젓가락으로 무침을 휘저어보았다. 다행히 오이는 없었다. 그때 바로 옆에서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혼잣말 비슷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나를 향한 말이었다.
"이거 여기 두면 안 돼요."
고개를 돌려 종업을 바라봤다. 종업원은 옆 테이블의 빈 접시와 빈 병을 치우고 있었다. 순간 식당 안을 둘러봤다. 아직도 빈 테이블이 많았다. 다시 종업원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종업원은 양손에 접시와 병을 들고 멀어지고 있었다. 종업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내 고개를 돌려 빈 잔을 채우고 한 번에 들이켰다. 곧바로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테이블 좀 치워요."
"다 치울까요?"
"아니. 이거, 저거 갖고 가세요."
"아... 네..."
"그리고 술 한 병 더 주고, 빈병 바로 치워주세요."
"네."
종원원이 가고 술잔을 다시 채웠다. 술잔을 비운 후 옆에 있던 아내에게 뭐라고 뭐라고 종업원을 욕했다. 뭔가 안쓰럽게 바라보는 아내를 앞에 두고 지치지 않고 씩씩 댔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종업원을 하대해 지칭하며 감정을 쏟아냈다. 어느 정도 화풀이가 끝나갈 때쯤 아내는 이거, 저거 치우라며 신경질을 내서 뭐 하냐며 다독였다. 그 말을 듣고 있으니, 요 몇 년 사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분개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못된 놈들, 부정한 일들을 수도 없이 봤는데 이 정도로 분개한 적이 있던가 싶었다. 그러면서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가 불현듯 떠올랐다. 소주를 꺾어 마셨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