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태 Mar 01. 2017

난 그런 하찮은 사람이 아니다.

가면 탈착

반년 가까이 출연했던 방송에서 사실상 잘렸다. 한 달여 전부터 낌새가 있었다. 휴일 저녁 늦은 시간에 걸려온 작가의 전화 자체가 불편했지, 그의 말들에는 무덤덤했다.  오히려 내 촉이 살아 있구나, 라는 으쓱함마저 들었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아이고 통화 괜찮으세요. 쉬고 있는데 너무 늦게 연락을 드렸죠."

"아, 작가님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방송 시청률이 최근에 너무 안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프로그램 초기부터 나왔던 패널들을 위주로 방송을 꾸려보자는 결정이 났습니다. 죄송해요. 당분간은 연락을 못 드릴 거 같아요."

"아, 네"


"이거 정말 죄송해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아, 네. 네."


예상했던 일이다. 난 차분하게 작가의 말을 받았고, 내 감정을 솔직히 전했다. '이제 녹화날을 체크해두지 않고 다른 일정을 잡아도 되겠군'이라며 짐 하나 덜었다고 생각했다.


"왜, 녹화 어떻게 된 거야?"


작가랑 통화할 때 와이프가 옆에 있었다. 와이프는 내가 또 언제 TV에 나오는지 항상 궁금해한다. 그럴 때마다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해왔다. 녹화한 내용이 언제 방송되는지 정말로 난 모른다. 그리고 관심도 없다. 우연히 와이프가 "오빠 지금 TV에 나온다"라고 소리치면 그때 TV 화면으로 내 모습을 잠시 보다 어색해 고개를 돌리곤 했다. 선배의 추천으로 방송을 하게 됐고, 쏠쏠한 용돈 벌이라는 점에서 내 시간을 빼왔을 뿐이다. 선정적인 내용을 요구하는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틈틈이 와이프에게 강조해왔다. 


"어, 작가가 당분간 연락을 못한다네."


와이프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옆에 딱 붙어서 내 얼굴을 쳐다본다. 표정이 '괜찮아',라고 말하고 있다. 내 감정에 동요가 일어날 거 같은 불안감이 살짝 드는 찰나였다. 


"음.. 왜 그러지. 아쉽네."


빡, 화가 치밀어 오르려 한다. 난 잘렸다는 통보나 받고, 능력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탄로 나고,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동정과 위로의 대상이 돼야만 하는 '그런 한찮은 사람'이 아니다. '아쉽네'라는 단어가 내 자존심을 건드리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다. 난 '그런 하찮은 사람'이 아니기에 감정에 동요가 없다. 조금 전 통화는 '내가 작가의 입장을 전적으로 이해준 상황', 이라는 점을 와이프가 캐치하기는 쉽지 않을 테다. 그런데 얼굴이 화끈 거린다. 


"뭐가, 아쉬워. 잘된 일이야. 딱히 내키는 일도 아니었는데 뭘.. 용돈벌이쯤으로 생각했던 건데 뭘.. 시청률이 낮아서 옛날 패널들을 다시 써보려는 거래. 이제 녹화날 비워두지 않아도 되니까 속이 후련하네. 음.. 분리수거 좀 하고 올게요."


평소보다 분리수거가 빨리 끝났다. 쓰레기마다의 속성을 꿰뚫는 분석력으로 플라스틱, 빈병, 비닐, 캔 등을 구분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니트릴 폼 고무를 사용해서 항마모성과 신축성이 뛰어난 천하무적 장갑을 낀 손놀림은 거침없었다. 손을 털고 담배를 꼬나물었다. 연기를 자꾸 하늘을 향해 내뱉고 집에 들어왔다.  

작가의 이전글 이런 송별회는 안 하는 게 마땅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