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무사히 보내다니!
파주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이사를 끝내고 (그래봤자 짐이 든 가방 몇 개를 나른 것이 다였지만) 이모가 사다 준 컵라면과 김밥을 먹고 어지러진 방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해방감이 느껴졌지만 슬픔이 더 컸다. 하지만 혼자 사는 것은 외롭지 않았다. 다만 쓸쓸했다.
주말이 되면 남는 게 시간이었다. 시간은 채워야만 보낼 수 있는 무언가인 것 같았다. 내 앞에 1시간이라는 항아리가 놓여 있고, 우물에서 물을 힘껏 길어올려 항아리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1시간이 사라졌다. 길러 본 사람을 알 테지만 물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것은 꽤나 힘든 노동이었다. 장기간의 고된 물 기르기 운동은 생활 근육이라고나 할까, 뭐라 말하기 힘든 체력을 선물로 주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토요일이 되면 침대에 거꾸로 누워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천천히 지나가거나 아침이 오지 않은 날들이 있었다. 핸드폰도 지겨워지면 일어나 집을 쓸고 닦았다. 탈모인가 의심될 정도로 바닥에 널려 있는 머리카락을 줍고 나면 역시 내가 사는 집인 게 확실하다, 라고 생각하며 못쓰는 티셔츠를 잘라 바닥을 닦는 일로 넘어갔다. 먹고, 씻고, 자고, 다시 일어나고. 이상하게도 바빴다. 8시쯤 (마시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며) 커피를 끓이고 책상 앞에 앉았다.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고 잠에 드는 꿈같은 생활이었다.
친구가 별로 없어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날도 많았다. 주말은 온전히 내 시간이었고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다. 누가 나에게 너무 재미없게 사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내 재미는 그저 여기, 이 집에 그리고 내 안에 있었다. 책에서 만나는 세상은 실제 세상보다 더 넓은 것 같았다. 눈을 감을 때는 우주까지 마음이 기지개를 펴는 것 같았다. 하루는 아주 순수한 바위가 된 듯했다. 하지만 바깥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적막한 집이 견디기 힘들기도 했다.
오늘도 토요일이 무사히 지나갔다. 외로움도 슬픔도 쓸쓸함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진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 나이쯤 되면 그런 감정들은 무던하고 어른스럽게 (그리고 도시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저 시간에 기대어 버리는 것이다. 혼자여도 괜찮은 것은 아닌가 보다. 오늘의 혼자는 꽤 힘들었다. 거리에서 아무 줄기를 뽑아들고 사랑한다, 안 한다, 사랑한다, 안 한다 하며 잎을 모두 떼어 버리는 심정으로 하루를 보냈다. 잎이 떨어진 줄기가 황량했다. 그 줄기가 혼자인지, 그 과정이 혼자인지는 모르겠다.
괜찮든, 괜찮지 않든 오늘의 혼자들에게 악수를 건네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제가 도움이 되기는 힘들겠지만 당신 마음을 알 것도 같네요 라는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고, 어색하게 웃으며 지나가 버리고 마는 그런 혼자들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