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이든지 버리는 걸 좋아한다. 비자발적 미니멀리스트다. 현재 유효하지 않으면 과거에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었든 가차없이 내다버린다. 편지도, 사진도 예외는 없다. 산지 얼마 안 된 책이라도 읽지 않을 것 같으면 과감히 중고서점으로 보낸다. 모든 과거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소중한 것만 챙기면 된다.
어쩌면 모순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의 80퍼센트는 과거로 향한다. 나는 다분히 과거지향적이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정돈하기 보다는 과거에서 배운 것을 현재에 다듬어서 내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인 것 같다. 내 머릿속에서 과거는 골든 에이지라고나 할까. 얼마나 힘들었든 항상 좋은 곳이다.
그러나 기록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고개를 젓고 말게 된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공감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지금이 더 나은 사람이다.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가 아니라 과거의 나는 너무 참혹할 정도로 별로라서 비교적 지금이 괜찮은 수준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을 겪었는지 나는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몇 년 전 내 사진을 보내왔다. 전 남자친구와 나, 내 친구 두 명이 함께한 대구 여행이었다. 한 여름의 대구는 40도가 넘었다. 그날 기온은 41도였다. (라고 추정된다.) 더운 걸 몹시 싫어하는데다가 (여름은 나의 적이다.) 남자친구와 심하게 다툰 채로 탱크 보이를 쥐고 (그런데도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했던 것이다!) 어느 교회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은 무척 웃겼다. 말 그대로 썰면 한 접시가 나올 만큼 입이 나와 있었다. 누가 말이라도 걸면 한 대 칠 기세인 표정으로.
그날 오후, 남자친구와 극적으로 화해 아닌 화해를 하고 (이해할 수 없게도 이 화해의 과정까지 모두 사진이 찍혔다.) 여행지를 돌아다니느라 진이 빠진 나는 마지막 코스인 수성못에서 열반에 든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다. 무엇에 해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저 부처의 미소가 따로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마음대로 안 되는 하루를 보내고 처연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던 나는 너무 웃겨서 거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 날에 있었던 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단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을 뿐. 별로기만 한 과거의 나는 지금 보니 꽤(가 아니라 아주 많이) 웃겼다. 어쩌면 기록은 재밌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나에게는 재미있는 일이다.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로 한다. 다음에 이 글을 본다면 조금은 웃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