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루아침에 전락한다.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아침,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는 체포된다. 아무도 그가 왜 기소당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길고 지루한 소송이 시작되었다. 독자들은 K와 더불어 당황하고 분노한다. 인물들은 줄곧 이해하지 못할 말을 늘어놓는다. 미로 같은 소설 속 공간은 끝없이 확장된다. 페이지가 넘어가며 독자들의 의문은 당혹스러운 각성으로 바뀐다. 이 음침하고 몽환적인 세계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은 무엇일까. 모든 상황이 부조리하다. 용케 정신줄을 놓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하지 않나. 그렇다. 요제프 K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카프카의 소설 속 세계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똑 닮았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며 어떤 목적도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삶은 소송이며 세계는 법정이다.
그의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라도 카프카의 이름은 몇 번 접해보았을 법하다. 그만큼 카프카가 문학계에서 가지는 위치는 독보적이다. 그의 이름을 딴 Kafkaesque(카프카적인: 부조리하고 암울한)라는 형용사가 영어 사전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다. 장 폴 사르트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밀란 쿤데라 같은 거장들 역시 카프카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예 자신의 소설에 ‘해변의 카프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해리 슈타인하우어의 말처럼 어쩌면 카프카는 20세기의 어떤 작가보다 문학계에 더 강력한 영향을 끼친 작가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잘 알려진 작가이지만 막상 그의 소설을 완독한 독자는 흔치 않다. 카프카가 작품 속에 조성한 이 어둡고 기괴한 미궁에서 헤매기란 만만치 않다. 작품 곳곳에 숨어있는 허방에 발을 헛디디고,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에 귀 기울일 각오를 해야 한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라는 첫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소설은 줄곧 요제프 K의 시선으로 소송의 진행을 좇는다. 독자들은 누가 K를 중상모략했는지, 어떻게 그가 자신을 변호할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소설은 어떤 해답도 주지 않는다. 변호사는 변죽만 울리고 법정은 창고 같은 건물 깊숙이 숨어있다. 출구는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한다. 중요한 단서를 쥔 인물들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우회로를 통해서만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우회로는 점점 늘어나고 목표와의 거리는 계속 멀어진다. 타락하고 부패한 법관들과 소통할 유일한 방법은 수상한 여자들을 통해서다. 요제프 K의 행동 역시 이상하다. 한밤중에 큰 소리로 옆방에 세 들어 사는 뷔르스트너 양 앞에서 자신을 호명한다. 마치 자신이 허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지 확인이라도 하듯. 뷔르스트너 양에게 갑자기 입을 맞추는가 하면, 변호사의 애인과 놀아난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선택해야 한다. 카프카가 늘어놓는 블랙 유머에 동참하거나, 책장을 덮거나.
케이를 둘러싼 세계는 공고하다. 케이는 끊임없이 그가 왜 기소당했는지, 그에게 적용되는 법이 무엇인지 묻는다. 존립할 이유를 설득하지 못하는 법이란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적어도 K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법은 애초에 우리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글은 불변하는 것이고 해석들은 종종 글에 대한 절망의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란 신부의 말처럼 로고스와 제도, 구조란 인간의 존재에 선행해 존재한다. 법의 존립 근거란 단지 그것이 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세계가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법을 구조와 문화, 제도로 바꿔 말해도 이 역설은 성립한다. 그렇기에 K의 의문은 무의미하다. 다른 피의자들은 비굴하게 법관의 눈치를 살피거나 무기력에 빠진다. K는 그들과 다르다. 계속 상황의 부당함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자신이 무죄임을 항변한다.
K의 죄는 부조리한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에 있다. 세상이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대해 개혁하고 참여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존재의 불안과 세상의 부조리함은 인생의 '디폴트' 값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K는 부조리한 세상에 당위라는 무기로 맞서고 있다. 그러나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완전하게 실행된 적이 있던가. 적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K는 죄인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을 대변하기도 한다. 태어나는 자, 모두 유죄 일지어다. 우리 모두 이 세계에 적응하는 일에 어느 정도 실패하기 때문이다. 또 얼기설기 서로 엮인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은 누군가에게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하다.
K라는 이니셜이 말해주듯 K는 작가의 분신이다. 체코에 거주하며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작가라는 신분은 카프카를 철저한 국외자로 만든다. 게다가 모든 작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상을 관찰하며 그것과 불화하는 숙명을 타고나지 않았나. 마침내 요제프 K는 사형에 처해 개처럼 죽어간다.
‘아무리 확고부동한 논리라 하더라도 살려고 하는 사람을 당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카프카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생각한다. 생존 본능은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제도를 뛰어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약혼과 파혼을 거듭한 연인 필리체 바우어에게 끌린 이유도 그녀의 강한 활기와 생활력 때문이 아닐까. 카프카는 소설 속의 K처럼 이 세계에 적응하는 일에 실패한 것처럼 느끼는 듯하다. 그가 남긴 기록과 일기에 카프카의 결벽과 강박이 잘 묻어난다.
카프카의 작품이 지닌 다양한 면면만큼이나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실존주의 작가들에 의해 재발굴된 탓인지 한때 실존주의적 해석이 유행하기도 했다.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카프카는 생존했을 때에도 이미 이름이 알려진 작가였으나 실존주의 작가들에 의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 밖에도 정신분석학 방법, 비교 문학적 방법, 신학적 해석, 포스트모더니즘적 방법 등 수많은 해석의 틀이 그의 텍스트를 분석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해석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카프카 문학이 지닌 힘의 원천이 있다. 문예비평가 한스 마이어는 ‘카프카, 정녕 끝이 없는 것인가?’라는 논문을 통해 한계를 모르는 카프카 소설의 다의성에 관해 설명한다. ‘모든 문장이 나를 해석해 보라고 하면서 어떤 문장도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이 카프카 소설의 특성을 함축한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에서 허무와 냉소만을 발견하는 것은 그의 텍스트를 표피적으로만 읽은 탓이다. 카프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늘 주어진 세계에서 탈주를 꿈꾼다. 비록 그 탈주가 실패로 돌아간다더라도. ‘변신’에서처럼, 꽉 막힌 세계에서 벌레로 변신하는 것 역시 일종의 탈주이다. 요제프 K 역시 부조리한 세계에서 자기만의 법을 찾아 헤맨다. 문지기와 신부, 감시자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인간 역시 이유도 모르고 태어나 종국에는 요제프 K처럼 의문을 품은 채 죽어간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며 거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
소설의 제목 <소송>은 독일어 원제를 직역했다. 범우문고판 등 예전 번역판들은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어 번역판이 ‘심판’이란 제목을 달고 나온 영향 때문인 듯하다. 솔, 문학동네, 열린 문학 등에서 나온 최근의 번역판은 ‘소송’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심판 역시 심리와 재판을 아울러 일컫는 단어이다. 그러나 대개 일반적 잘잘못을 가려 결정 내린다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니만큼, 법률관계에만 한정되어 쓰이는 ‘소송’이 소설의 제목으로 더 적합해 보인다. 소설을 읽고 소송이란 단어의 의미를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프란츠 카프카, ‘소송’, 문학동네, 권혁준 옮김, 2010)
생의 부조리함을 참을 수 없는 당신을 위한 처방: 살아가는 이유를 찾으려 애쓸수록 우리는 깊은 허무에 맞닥뜨린다. 그러나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곳이다. 이 세계를 탈주하기 위해 카프카의 유머 감각에서 영감을 받아보자. 탈주의 방식은 다양하다.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들은 '동물 되기'를 통해 탈주를 꿈꾸었다.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친구들을 즐겁게 하는 유희였으며 일종의 탈주였다. 카프카 소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출구를 찾고, 미로를 헤매며 막다른 곳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겁내지 말고 당신만의 탈주를 즐겨라. 때로 길을 잃을 잃어도 우리는 또 다른 우회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