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의학의 주장처럼 과연 노화란 질병일까. 노화와 질병, 그에 따른 최종 부산물인 죽음은 인간의 숙명이 아니던가. 세계보건기구는 2018년 노화(old age)에 질병 코드를 부여했다. 현대 의학이 노화의 종말을 말할 때, 한편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 노화와 죽음을 다루는 필립 로스의 문장은 시종일관 건조하고 담담하다. 메스처럼 서늘하게 벼려진 문장이 노년이란 환부를 베고 가른다. 2006년 발표한 <에브리맨>은 필립 로스의 스물일곱 번째 장편 소설이다. 막 70대에 접어든 작가가 쓴 노년에 관한 면밀한 관찰기이기도 하다.
‘에브리맨’은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을 뜻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채, 단지 ‘그’로 불린다.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서 잠시 이 땅에 머무르다 스러져가는 우리 모두 같은 처지가 아닌가. ‘라떼’를 말하는 모든 노인이 그렇듯, 그도 한때는 잘 나갔다. 광고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뉴요커였으며, 많은 여자가 따르는 매력 있는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쳐 홀로 늙어가는 노인일 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받아들이라는 말을 하릴없이 되뇐다. ‘받아들이기’란 이 소설을 관통하는 깊은 울림이다.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겪는 문제들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수술을 앞둔 그를 걱정하는 딸 낸시에게 그는 받아들이란 말을 건넨다. 그 말은 곧 장례식장에서 고인이 된 아버지에게 낸시가 건네는 추도사가 된다. 받아들이라는 말은 이처럼 가혹하고도 유용한 삶의 해법이다. 흘러가는 세월과 죽음에 맞설 방법은 ‘받아들이기’ 말고는 없다.
"에브리맨"표지와 저자 필립 로스
‘에브리맨’은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보석상에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가 판매하던 다이아몬드는 유한성에 예속된 인간과는 다르다. “불멸의 흙 한 조각, 죽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 기이하고 부조리하다. 불멸이란 축복은 울고 웃고 사랑하는 인간이 아니라 무심하고 아름다운 돌덩이에 주어졌다. 세 번째 부인과의 사랑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덧없이 사라졌지만, 그녀의 목에 걸어준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반짝인다. 그가 한 줌의 재로 돌아간 뒤 남은 어둠 속에서도.
신실한 유대교도인 가족들과 달리 그는 태생적 유물론자다. 그에게 종교란 “죽음과 신에 관한 야바위나 천국이라는 낡은 공상”에 불과하다. 그는 랍비가 약속하는 피안의 세계, 이데아와 관념의 늪에서 허우적대기를 거부한다. 보석을 감정할 때 쓰는 루페(볼록 렌즈를 사용한 작업용 확대경)를 통해 들여다보듯, 그는 왜곡 없이 세상을 관찰한다. 보석이 투영하는 맑은 빛은 불멸의 세계에 속하지만, 그의 루페를 통과한 사물과 생명은 끊임없이 소멸하고 생성한다.
그의 루페는 선악善惡이 아닌 미추美醜라는 잣대로 만물을 구분한다. 그가 믿는 유일신은 감각의 세계에 임하며, 오직 육체로만 숭배할 수 있다. 주어진 세계에 대한 충만한 향유가 그가 믿는 종교의 교리다. 그는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에 탐닉한다. 쾌락을 좇는 그의 본성은 만족스러웠던 두 번째 결혼을 파탄에 이르게 한다. 그는 누구나 겪는 중년의 위기에 충동적으로 대응한다. 그가 전성기를 누린 1980년대는 마초들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외도와 성적 일탈이 순순히 용인될 자리는 없다. 사회적 “생존 본능”은 그가 지닌 더 원초적인 생존 본능인 육욕에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그의 인생은 죽음-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절대 무無의 세계-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여정이다. 편도선 수술을 받기 위해 열두 살 무렵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는 옆 병상 소년이 사망하는 사건을 겪는다. 그 일은 평생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수없이 많은 낮과 밤, 아침 식사와 입맞춤으로 점철된 시간이 죽은 소년의 눈앞에서 굳게 닫힌다. 죽음은 한 인간 앞에 놓인 시간과 가능성, 무엇보다도 충만한 감각적 대상을 빼앗는 약탈자다. 죽음이라는 큰 허무는 늘 파도처럼 우리를 덮칠 준비가 되어있다.
두 번째 심장 발작을 겪은 후, 그는 이제 진정한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내리막길의 경사는 점점 급격해진다. 필립 로스는 쇠퇴하고 시든 육체가 겪는 비애를 섬뜩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국부 마취 때 겪은 공황, 가슴 밖으로 불거진 제세동기, 팔뚝에 남아있는 정맥주사 바늘…….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각은 육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다. 그의 모든 것이었던 육체에서 소외되는 기이한 경험은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신체를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무력감과 고립감, 수치심을 느끼며 그는 점점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어간다. “노년은 전쟁이 아니라 대학살”이었다.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그는 젊은 여성에게서 관심을 거두지 못한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은 그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땀에 젖은 젊은 육체가 그리는 곡선만큼은 여전히 자극적이다. 해변에서 만난 여성을 유혹하는 행위로 그는 수컷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 든다. 여성과 대화하는 동안, 그는 “바지 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법에 걸린 듯 빠르게 단단해지는” 것을 느낀다. 질병에 수반하는 불편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발기 역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 그러나 성적 흥분은 “숭고한 단독성”으로 승화한다. 예기치 못한 발기는 질병과 달리 생명력과 남성성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막바지에 선 사람들이 종종 그렇듯 그는 살아온 나날을 되돌아본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성장했고, 그의 형 하위와는 돈독한 우애를 나누었다. 아버지의 보석상에서부터 다진 감각으로 자본주의의 꽃 광고업계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연쇄 남편”이라 씁쓸하게 자칭하듯, 세 번의 결혼생활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부인들과 자식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한마디로 그는 명암과 부침, 굴곡이 함께 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
죽음을 앞둔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으로 행세했으나, 그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택한 첫 결혼은 곧 실수임이 드러난다. 그는 진정한 사랑이라 믿은 연인과 결합하기 위해 이혼과 재혼을 감행한다. 그러나 소중하게 일군 두 번째 가정마저 그의 외도로 인해 무너진다. 육체적 끌림만이 있었던 세 번째 결혼의 귀결 역시 이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감한다. 자신이 저지른 모든 실수는 “뿌리 깊고 멍청하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그는 충실하게 욕망을 좇았으나 다른 이들을 감쪽같이 속일 만큼 교활한 인물은 못되었다.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설득할 만큼 뻔뻔하고 유들유들하지도 못했다. 이제 그의 곁에 남은 사람은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외동딸 낸시뿐이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은 것은 딸 낸시와의 이별이다. 죽음은 감각의 차단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관계와의 단절을 뜻한다. 그는 사랑과 증오, 경멸과 연민, 동정과 의무감으로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맺어왔다. 세상 사람들의 관계가 대개 그러하다. 그러나 딸 낸시와의 관계만은 다른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순수한 사랑으로 이루어졌다. 남아있는 나날, 오직 낸시와 나누는 깊은 애정만이 그를 버티게 한다.
두 번째 경동맥 수술을 앞두고 그는 부모의 묘지를 찾는다. 그는 인부가 무덤을 파는 광경을 목격한다. 새 무덤을 팔 자리를 표시하고, 거기 맞춰 흙을 잘라낸다. 틀에 맞게 떼를 잘라내고 무덤 뒤쪽에 보기 좋게 갖다 놓는다. 그렇게 마련한 2m 깊이의 구멍은 유족과 사자를 위한 보금자리다. 그 세심한 작업을 통해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어떤 방식으로 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조상의 유골과 연결된 사슬의 한 고리가 될 것이며 또 그런 방식으로 다음 세대와 연결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문, 더 나아가 인류의 영속에 대한 믿음이 개인의 유한성과 개별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류애에서 우러난 깊은 배려가 최후까지 함께한다는 사실이 그를 위로한다.
소설에서 그는 세 번의 장례식에 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례식은 그의 부모를 보내는 자리였다. 세 번째 장례식은 그 자신을 위해 마련된다. 수술실에서 일어난 심장마비로 그는 결국 깨어나지 못한다. 장례식이란 주인공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기이한 행사이자 산 사람을 위한 위로의 장이다. 그의 장례식 역시 다른 장례식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 빠졌다는 점이었다.”(23쪽)
한 사람의 죽음과 더불어 한 세계가 영원히 닫혔다. 그가 사용했던 루페의 렌즈 역시 흐릿해진다. 그가 평생 루페로 들여다보던 세상은 “십억, 조, 천조 캐럿짜리 행성 지구”였다.
필립 로스는 1933년 미국 뉴저지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코멕 맥카시, 토머스 핀천 등과 더불어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평가받는다. 포크너 상을 세 번 수상한 최초의 작가이기도 하다. 평생 30권이 넘는 소설을 썼으며, 70대에 들어서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유령 퇴장>(2007), <전락>(2009) 역시 노년기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다룬 소설이다. 노년에 대한 필립 로스의 시선은 냉정하고 군더더기 없다. 불필요한 감상이나 위안은 끼어들 틈이 없다. 삶과 죽음의 불가해함과 부조리함을 담담하게 증언할 뿐이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선정되었지만, 2018년에 사망하면서 수상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다. 필립 로스 역시 그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있음에서 풀려나”,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여전히 살아남아 독자와 함께한다. 고령화 시대를 맞은 우리에게 필립 로스의 소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늘어난 수명은 곧 늘어난 노년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노년기에 닥칠 비애와 절망을 극복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방법을 찾는 일은 필립 로스가 독자에게 남긴 숙제이다.
곧 다가올 노년기가 두려운 당신을 위한 처방: 며칠 전 누군가의 부음을 들은 당신, 멀기만 하던 노년기가 성큼 앞으로 다가온 기분이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은 다른 사람들만의 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누구나 평화롭고 행복한 노년을 영위하기를 바라지만,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후회로 가득하다. 그러나 자신의 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처음이며, 크고 작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죽음이란 ‘큰 허무’가 닥치기 전에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용서하자.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