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길을 걷다 실종자를 찾는 현수막과 마주친다. 빛바랜 사진 속 주인공은 몇십 년째 나이를 먹지 않는다. 남은 이들의 심경을 차마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실종을 기점으로 남은 이들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여있다. 확언이 된 죽음은 절망과 오열을 부른다. 죽음은 망자와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은 이들이 상실을 받아들일 때, 그들은 마음의 평정을 회복할 기회를 얻는다. 때로 그 죽음은 시대의 야만, 모순과 맞물려 있다. 일터에서 청년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때, 열사의 어머니들은 투사로 거듭난다. 그렇게 남은 이들이 떠난 이들과 연결될 때, 망자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부활한다. 그러나 애도할 수 없는 상실은 피 흘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죽음의 흔적도 남지 않은 실종이란 겹으로 싸인 의문 덩어리’는 ‘어디서 어떻게 미궁으로 포획됐는지’조차 알 수 없다. 절망과 인고의 세월 속에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들은 살아도 살아있지 못하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 표지와 저자 조용호
조용호의 소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은 사라진 연인을 찾는 한 남자의 긴 여정을 그린다. 작가의 말처럼 ‘과거 한 시절 에피소드가 아니라 언제든지 맞닥뜨릴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래전 실종된 연인 하원과 닮은 여성과 ‘내’가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들이 만난 장소 역시 어느 광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장의 모습은 예전과 다르다. 구호와 울음, 아우성으로 가득했던 그곳을 풍자와 웃음, 촛불이 메꾸고 있다. 광장은 이제 투쟁의 공간이자 축제의 장이다. 그러나 부조리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그들의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우연한 만남은 곧 하원을 찾는 미로와도 같은 여정으로 이어진다. 소설은 시종일관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모습과 과거의 기억을 넘나 든다. 차갑고 건조한 기록이 담긴 공문서와 남은 이들의 기억이 중첩된다. 정제된 형식을 갖춘 기록과 왜곡되기 쉬운 기억 중, 어느 것이 실체적 진실을 담보하고 있을까. 살아남은 이의 육성과 바스러진 기억은 ‘세월이 흐를수록 선명해지다가 미라로 박제’되었다.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거친 사회는 얼핏 과거와 단절된 듯하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의 또 다른 이름이다. 처벌도 뉘우침도 없던 죄는 여전히 이 사회의 환부로 남아있다. 어설프게 봉합된 상처는 피 흘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암흑 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대학 시절 동기 수호를 떠올린다. 캠퍼스에서 투신해 스러져간 수호는 어둠의 세계에 속해 있다. 화자에게 현실은 ‘살아서 견디는 지옥이거나 간혹 천국일지 모르는 우주의 무심한 무정형의 한 곳’이다. 이런 자각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바림하듯 희미해진다. ‘태어날 때부터 빛이라곤 구경한 적도 없는’ 로드 마스터에게 어둠과 빛의 구분이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포기하고 초혼장까지 치렀다네. 그대도 없는 빈 관에 그대가 아꼈던 물건과 옷가지들을 넣어 땅속에 묻었어. 그대의 혼이라도 깃들어 안식을 취하라고, 그대가 이승에서 숨을 쉬고 있다면 이런 어리석은 의식도 없겠지만 우리는 그대의 흔적이라도 붙들고 그대를 기억하고 싶었던 거지.’ -본문 42쪽
이런 독백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여전히 하원을 떠나보내지 못한다. 남은 자들은 실종자를 삶과 죽음의 경계에 두기를 택한다. 그들이 죽었을 개연성이 더 클지라도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멕시코인들은 제왕나비를 매년 찾아오는 망자의 혼이라고 여긴다. ‘나비들의 숲은 삶과 죽음 사이를 잇는 중음의 공간’이다. 중음이란 사람이 죽은 뒤 다음 생의 몸을 받아 날 때까지의 영혼의 상태이다.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적 상태라는 면에서 실종자들 역시 그렇다.
페르시아를 상징하는 사자상은 반사할 불빛이 없는 곳에서 샛별처럼 스스로 눈을 빛낸다. 불가해하고 신비하다. ‘나’는 ‘이승과 저승까지 다 볼 수 있는 푸른 눈,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준 이들이 간 곳, 저 눈을 빌려 이승에서 억울하게 추방당한 그리운 이’들을 보고 싶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서로 푸른 신호를 주고받는 사자의 눈이라도 빌려 실종자와 교신하고 싶은 애달픈 마음에 읽는 이의 마음이 먹먹하다.
여정이 끝나갈수록 희연이 ‘나’의 딸일 가능성은 커진다. 희연은 생모를 찾는 여정 속에서 자신의 기원에 대한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간다. 애초에 희연은 생물학적 부모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부질없고 새삼스럽고 서러워서, 처음에는 따라나설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던’ 희연이었다. 그러나 여정이 계속될수록 희연에 대한 생모의 웅숭깊은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희연이 버려진 이유에 시대의 아픔이 빚어낸 불가항력이 개입됐음을 알게 된다. 하원의 족적을 따라가며 마주친 그녀의 맑고 곧은 성품에 자신의 모습을 포개놓게 된다.
‘그 거대한 생명의 강에 물 한 방울 보탰다고 함부로 나서서 그 강물을 소용돌이치게 할 수 없’는 ‘나’의 부정이 애틋하다. ‘희연을 세상에 뿌린 존재들이란 바람 속 태곳적 소문 같은 것’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토록 세심하고 섬세한 마음결을 공유하는 그들 세 사람이 이미 가족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마침내 부녀일지도 모를 두 사람의 여정은 막바지에 이른다. 소설은 일종의 열린 결말로 끝난다. 한 여성이 바다 저 멀리 해무를 뚫고 윤곽을 드러낸다. 그녀는 과연 ‘나’의 연인이자 희연의 생모인 하원일까.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이다.’
저자의 경험이 배어있는 소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은 오랜 산고 끝에 태어났다. 어두운 시대의 기억을 소환하는 일은 저자에게도 독자에게도 쉬운 작업은 아니리라. ‘나’의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아픔으로 가득하지만, 결코 ‘파레시아’(‘모든 것을 말하기’를 뜻하는 그리스어로 진솔한 자기표현, 두려움 없이 말하기를 뜻한다)의 힘을 잃지 않는다. 시대의 아픔을 말하는 한, 어떤 소설도 후일담이라 말할 수 없다. 기억과 기록, 역사가 말해주듯 과거란 미래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모든 후일담은 현재진행형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묵시록이다. 소설의 어투는 시종일관 담담하고 고아하다. 야만에 맞서는 세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는다. 저자의 말처럼 ‘모든 죽음은 의문사이고, 그리움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숙명’이다. 시대의 아픔은 인간의 보편적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문학을 가능하게 한다. 기억과 예술이 있는 한, 망자들은 늘 우리 곁에 머문다. 사자의 푸른 눈을 빌릴 시간이다.
저자 조용호는 1998년 ‘세계의 문학’에 단편을 발표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집 ‘떠다니네’ ,‘왈릴리 고양이나무’, ‘베니스로 가는 마지막 열차’, 장편소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 ‘여기가 끝이라면’, ‘시인에게 길을 묻다’, ‘노래, 사랑에 빠진 그대에게’, ‘돈키호테를 위한 변명’ 등이 있다. 무영문학상, 통영 김용익문학상을 받았다.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으로 2023년 제28회 한무숙 문학상을 수상했다. (민음사, 2022)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당신을 위한 처방: 우리 모두 다른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한다. 누군가에게는 해묵고 퇴색한 기억이 다른 이에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생생해지는 기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고받았던 감정이 진실하고 아름다웠다면, 그 사람도 비슷한 마음의 무게로 당신을 떠올릴 것이다. 아름답고 소중한 인연을 맺은 일에 감사하자. 살아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다. 야만의 시대를 거쳐온 소설 속 인물들 역시 사랑과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