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회는 과연 도래할까. 오랫동안 성(性)은 고정불변한 것으로 여겨졌다. 성(性) 정치 담론과 젠더 개념의 등장, 의학 기술의 발달로 자명해 보이던 현실은 뒤집혔다. 티브이를 켜면 트랜스젠더 방송인들이 입담을 과시한다. 형제와 남매간을 거쳐, 이제는 자매 사이가 된 워쇼스키 감독들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타고난 성(sex)에 매여 산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변희수 하사에게 그랬듯 타고난 성을 거부한 자에게 사회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몇 년간은 여자로, 그 이후로는 남자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그 반대의 경우 역시 상상해 보자. 이 유쾌하고 전복적인 모험을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대리 체험하자. 상대편 성에 대한 혐오가 넘쳐나는 요즘, ‘여(남)성 되기’를 통해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성 정체성에 대한 오랜 고민, 사람들의 수군거림, 수술대에 오르는 불안을 감수할 필요 역시 없다. 그저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면 된다. 혼수상태와 같은 긴 잠에서 깨어난 올랜도처럼.
버지니아 울프
소설 <올랜도>는 16세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종횡무진한 한 인간의 성장기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놀라운 상상력으로 구현한 트랜스젠더 판타지이며, 가상의 인물 올랜도의 일생을 기술한 전기(傳記)이기도 하다. 전기 작가인 화가는 툭하면 독자에게 끼어들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주인공 올랜도는 높은 신분, 부와 명예, 무엇보다도 신비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타고났다.
‘발그스레한 볼은 복숭아털 같은 솜털로 덮여있었고, 입술 위의 잔털은 볼의 잔털보다는 약간 짙을 정도였다. 입술 자체는 자그마하며, 아몬드 빛의 희고 정교한 치아 위에 약간 치켜 올라가 있었다.’ ‘꽃미남’ 올랜도는 이미 외모에서부터 양성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소설 여기저기서 올랜도의 미모를 다채롭게 묘사한다.
금수저 올랜도의 내면세계는 복잡하다. 순진무구한 동시에 여자를 밝히며, 수줍은 성격이지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올랜도는 저자의 분신이자, 다양하고 분열된 자아상을 지닌 모든 현대인을 상징한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여러 일에 도전한 철부지 소년은 ‘사랑과 야망, 여인과 시인은 꼭 같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본래 젊은이들은 염세에 빠지기 쉽고, 염세를 극복하는 방법은 일 중독이다. 마침내 올랜도가 향한 곳은 터키(튀르키예) 땅-유럽과 아시아 양쪽에 속한 투르키예에서 올랜도가 여성으로 변신하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이다. 정치와 외교의 세계에서 대영제국의 대사로 일하며 올랜도의 ‘남성성’은 극대화된다. 그는 결국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져든다.
긴 잠은 여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올랜도는 여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성의 변화가 비록 그들의 미래를 바꿔놓기는 했으나 그들의 정체성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화자는 능청스럽게도 올랜도의 성별에 대한 증명을 생물학자와 심리학자들에게 맡기자고 제안한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올랜도를 영지의 개와 사슴, 동물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말없는 짐승들의 판단력이 우리 인간들보다 뛰어’ 나기 때문이다.
하인들 역시 올랜도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남녀의 성차보다 인간으로서 고유한 정체성, 올랜도의 개성이 우선한다. 사랑하는 대상에 있어 그가 남자, 혹은 여자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문제가 되는 분야는 법과 제도의 세계이다.
고향에 온 기쁨도 잠시, 올랜도는 기나긴 소송에 휘말린다. 남편이나 친척 없이, 여성 홀로 오롯이 재산을 상속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몇 세기에 거쳐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소송은 여성 지위와 사회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긴 소송을 통해 얻은 절반의 승소는 여성들이 벌인 조용하고 오랜 투쟁의 결과였다.
성차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지만, 성차를 차별로 연결하는 주체는 자연이 아니라 사회다. 올랜도는 여성이 되어서야, 비로소 여성에 대한 차별과 그에 관한 모순에 눈뜬다. 귀족 백인 남성으로 살 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일이다. 결투, 전쟁, 행진, 군대를 지휘하는 일은 이제 전생의 기억 같다. 또 올랜도는 그가 사는 사회에서 ‘여인의 신분이라는 구조물 전체가 바로 이 순결이라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순결이란 오직 성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성의 생활 전반을 지배한다. 바람둥이이자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올랜도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이제 올랜도는 욕망의 대상에 직접 접근하는 대신, ‘우회적’으로 대상을 얻어야 한다. 여성이 되어서도 올랜도는 여전히 귀부인 신분에 대단한 미녀로 그려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올랜도가 그에게 부과된 ‘성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올랜도는 어느 정도 여자로서의 ‘역할 놀이’를 즐기기까지 한다.
‘그때에는 그녀가 따라다니는 몸이었고, 지금은 도망가야 하는 신세다. 어느 쪽이 더 행복한가? 남자일까, 아니면 여자일까? 어쩌면 똑같지 않을까? 아니야, 가장 감미로운 것은 거절하고, 그가 난처해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저항하고는 양보하고, 양보하고는 저항하는 것만큼 멋진 것은 없다.’ (본문 185쪽)
올랜도는 요부가 되어 유혹과 추파, 밀당을 즐긴다. 한편으로는 조신하고 정숙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수행한다. 곧 올랜도는 다른 여자들처럼 남자들의 우스꽝스럽고 허풍스러운 모습을 하찮게 여기게 된다. 올랜도는 정치, 군사, 권력 등 골치 아프고 저속한 일들을 남성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제 올랜도에게 남성성은 저열하고 야만적인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내 올랜도는 자신이 여자인 것이 다행이라고 소리친다.
어느 날 올랜도는 옷장에서 남성이었을 때 입던 옷을 발견하고 그 옷을 입고 외출한다. 그러자 올랜도는 금세 남자다운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처럼 젠더란 사회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으며 제도와 문화에 의해 강화된다. ‘남자처럼 보였고, 남자처럼 느꼈고, 남자처럼 말’하지만 올랜도는 교태를 부리는 여성의 속셈을 간파한다. 여성으로서 살아온 경험이 동성의 속임수를 간파하게 했기 때문이다.
19세기가 도래하고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란 제도가 결합하자, 올랜도는 진정한 사랑과 결혼을 꿈꾼다. 올랜도 역시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대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올랜도는 남성과의 진실한 사랑을 통해 비로소 양성의 특성을 고루 갖춘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소설은 남성과 여성이 각자 독립성을 유지한 채,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속삭이는 듯한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저자는 올랜도가 지닌 여러 정체성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여성성과 남성성 역시 올랜도가 지닌 여러 정체성 중 하나이다. 그 자체로 완전하고 단일한 여성성과 남성성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강요가 개인을 억압할 뿐이다. ‘여자가 남자처럼 관대하고 솔직할 수 있으며, 또한 남자가 여자처럼 신비스럽고 섬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편견이나 두려움 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올랜도>는 버지니아 울프가 대작 <파도>를 집필하기 전, 몸을 풀기 위해(?) 가볍게 쓰려던 소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의 의지와는 달리 또 하나의 걸작이 탄생하고 만다. 버지니아 울프의 페미니즘을 잘 보여주는 소설인 동시에, 문학 양식에 대한 저자의 오랜 고민을 드러내는 소설이다. 역자 박희진의 말처럼 ‘울프만큼 많이 알려져 있으면서 울프만큼 읽히지 않는 작가도 드물다.’ 우리 역시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통해 그녀의 이름에 익숙하지만, 그의 소설을 읽은 이는 정작 많지 않다.
그러나 ‘올랜도’ 읽기는 어렵고도 즐거운 경험이다. 난해함과 재미를 동시에 갖춘 이 소설은 인간과 사회에 관한 날카롭고 유머러스한 통찰로 가득하다. 인간의 정체성 통합과 젠더 문제에 대해 이토록 위트 있고 세련되게 표현한 소설이 다시 탄생할 수 있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올랜도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한 뒤에 급격히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올랜도는 작품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남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여성으로 남아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작품이 탄생한 지 거의 백 년이 되어가는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표피적 젠더 담론과 남녀 갈등을 보면 울프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188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20세기 문학계의 대표적 모더니스트이자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다. 독학으로 쌓은 지식으로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이 된다. 소설가 E.M. 포스터, 후에 남편이 된 레너드 울프와 교류하며 문학과 예술에 대해 토론한다. 1915년 ‘출항’을 간행한 이후, 소설 ‘델러웨이 부인’(1925), ‘등대로’(1927), ‘세월’(1937)을 연달아 펴낸다. 1929년에 나온 ‘자기만의 방’은 그녀의 페미니즘을 여실히 드러내는 에세이다. 평생 이어진 정신 질환과 예민한 성격은 수 차례의 자살 시도로 이어진다. 마침내 울프는 1941년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우즈 강에 뛰어드는 방법으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문학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길고 아름다운 연애편지’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 ‘올랜도’는 그녀가 떠난 뒤에도 우리의 곁에 남아 남녀의 사랑, 모순으로 가득한 삶, 시(詩)에 대해 읊조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박희진 옮김, 솔, 2019, 원제: Orlando)
상대편 성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당신에게: 당신은 금성에서 오지 않았고, 그 역시 화성에서 오지 않았다. 남녀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 우리 모두 사랑에 상처받고 수치심을 느끼며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 상대편 성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가 혐오와 차별을 부른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함께 세상을 헤쳐나갈 동반자이며, 서로를 필요로 한다. 상대를 여성이나 남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남(여)성으로 살아가는 일 역시 여(남)성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힘겹고 외롭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