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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Oct 21. 2023

 [치유의 책방]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

사회의 밑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암울할 때

 어느 날 당신이 백여 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과연 무사히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안락한 현대문물의 수혜를 누릴 수 없는 시공간으로 이동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한다. 당신의 허벅지를 파고들 날카로운 개의 이빨을 막아내야 하고 추적자의 시선을 따돌려야 한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목표는 하나다. 당신이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온(slip) 이유를 깨닫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 당신에게는 마음 내키는 대로 현재로 돌아올 초능력도, 타임머신도 없기 때문이다.      

<킨> 표지와 저자 옥타비아 버틀러

작품의 제목 킨 kin은 영어 kindred(일가친척)의 약자로 복잡한 혈연으로 묶인 ‘나’의 숙명을 상징한다. 또 kin은 화자의 가계도를 넘어서, 인류 모두가 여러 방식으로 엮인 공동체를 뜻하기도 한다. 그 공동체는 피부색과 성별, 계급, 민족을 초월한다. kin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복잡다단한 정치 행위가 펼쳐지는 장인 동시에,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 다나는 1976년을 살아가는 흑인 여성이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다.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는 계층으로서 매 순간 자신의 타자성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1815년의 시공으로 끌려 들어간 다나에게 지금까지의 고민은 사치에 가깝다. 채찍질과 강간, 살해당할 위험이 그녀를 위협한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야만 앞에서 인간은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현대사회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나는 “노예란 길고 느린 둔화 과정”임을 깨닫는다. 소설은 노예제가 흑인들의 의식과 일상에 파고 들어가 내면화되고 공고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도와 구조가 된 폭력은 인간의 몸뿐 아니라 마음도 예속한다.     

저자는 섬세한 시선으로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간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필연적으로 다양하고 복잡 미묘한 감정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노예주 루퍼스와 노예 나이절이 주고받는 감정은 우정과 신뢰다. 루퍼스가 노예 앨리스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에 가깝다. 비록 굴절되고 비틀린 형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증오만은 아니어서 존경심과 연민, 우정이 개입한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루퍼스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업신여기면서도 무서워했다....(중략)...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떤 종류의 예속이든 이상한 관계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446쪽)     


이상한 관계란 애증과 그에 따르는 자괴감, 수치심으로 구성된다. 때로 스톡홀름 신드롬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런 감정에 당황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을 착취하는 대상에게 느끼는 사랑이란 자기모순과 더불어 동족에 대한 배신을 뜻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같은 흑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질투와 반목 역시 세밀하게 보여준다. 앨리스는 같은 노예들에게 미움받는다. 백인 노예주에게 잘 보여 편안하게 생활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앨리스는 루퍼스에게 계속 강간당하는 상태이며, 노예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나는 글을 읽고 쓸 수 있으며 ‘백인’처럼 말한다는 이유로 “하얀 검둥이” 취급을 받는다.     

저자는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백인이 존재할 수 없듯이, 단일하고 동질적인 흑인 역시 없다고 말한다. 자유민 흑인은 비록 제한된 자유를 누릴지라도 노예와는 다른 지위를 지닌다. 끝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노예가 있는가 하면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는 노예도 있다. 뼛속까지 노예제도에 동화되어 백인 편에 선 흑인도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 역시 누구보다 빠르게 일제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나. 밭에서 일하는 노예는 집안일을 하는 흑인을 부러워한다. 여성 노예는 남성 노예보다 더 비참한 처지에 놓였다. 노예주에게 성노예로 이용되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간다.      


당대의 상식은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야만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떤 이도 그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과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루퍼스의 아버지 와일린은 좋은 인품을 지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딱히 나쁜 인물이랄 수도 없다. ‘평범한’ 노예주는 ‘평범한’ 악을 수행한다. 처음 이 시대로 끌려왔을 때, 다나는 타자를 대하듯 동족을 바라본다. 노예 해방과 흑인 인권 운동이 가져온 변화라는 간극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다나는 차츰 자신의 조상 격인 그들 흑인에 대해 마음 깊이 이해하고 존경하게 된다. 그들은 얼핏 무력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깊은 인내심과 삶에 대한 의지로 야만의 시대를 버텨왔다. 거대한 폭력과 예속 상태에서 ‘살아남기’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위대하고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닫는다. 이처럼 우리와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저자는 우리의 잣대로 다른 이들의 삶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가에 관해 묻는다.    


<킨>에 등장하는 폭력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소설처럼 인종 차별의 형태로 드러나거나, 제국주의 혹은 파시즘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젠더, 계급, 민족 등 ‘다름’을 차별로 연결하는 모든 영역에 폭력은 만연한다. 작가는 인간성의 회복과 연대만이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다나의 시간여행에 우연한 동행자가 된 남편 케빈은 비록 백인이지만 흑인의 편에 선다. 케빈은 흑인인 다나와 결혼할 정도로 그녀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저자가 이 소설을 쓴 1970년대에는 흑인과 백인의 결혼이 더 어려웠음을 상기하자) 사랑하는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공감과 연민은 연대의 시작이다.   

  

 “어머니는 당신과 이야기를 할 때 눈을 감고 있으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흑인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고 하시지” (498쪽)     


루퍼스의 말에서 드러나듯 노예주 역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노예들이 자신과 동등한 인간임을 알고 있다. 약자들과의 연대는 바로 당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킨이란 모든 사람이 얼기설기 엮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킨에는 영원한 승자도 약자도 없다. 다음 차례에 허벅지에 날카로운 개의 이빨이 박힐 사람은 당신일지도 모른다.     


저자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는 보기 드문 흑인 여성 SF작가이다. <킨>의 화자 다나는 작가의 분신이다. 버틀러 역시 다나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작가가 되기를 바라던 소녀였다. 네블러상과 휴고상을 여러 번 수상했으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작가이다. “80세가 되어서도 계속 글을 쓰기를 꿈꾸는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버틀러는 안타깝게도 58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아프리카 문화와 선진기술을 융합하는 예술 사조인 아프로퓨처리즘(afro futurism)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최초의 흑인 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 역시 버틀러에게 빚지고 있다.

(이수현(옮긴이), 비채, 2023.4.24. 원제: kindred)     

 

사회에서 밑바닥에 벗어나지 못하는 당신을 위한 처방: 부모보다 경제적으로 부족한 첫 세대가 탄생했다. 취업도 결혼도 집 장만도 먼 나라 이야기 같다. 무엇보다도 양극화 사회가 가져온 모순 때문에 괴롭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에 서있는 듯하다. 우리 조상들이 묵묵히 견뎌온 야만의 시간을 상기하자. 제도와 사회 구조를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약자는 늘 약자와 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소외된 사람들의 연대만이 결국 사회를 바꾼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은 예상치 못한 순간 찾아오는 소소한 기쁨이다. 힘든 시간 속에서도 삶을 즐기자. 다윈의 말했듯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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