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불행의 원인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때문일 수도, 노름에 빠진 아내 때문일 수도 있다. 때로는 부모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르게 성장한 아이가 문제다. 비혼주의가 유행이고, 아이 없이 사는 부부가 늘어간다. 현재 한국의 출산율은 OECD 국가 중 최저이다. 다른 나라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세계 주요국의 출산율은 1960년대 이후 반토막났다. 그러나 여전히 화목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이라는 낡은 제도에 뛰어드는 남녀가 있다. 그들 중에서 앞으로의 가정생활에 먹구름이 드리우리라고 상상하는 이는 한 명도 없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20여 년 동안 한 가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잔혹극이다.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화목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에 골인한다. 두 사람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60년대의 시대 정신’ 속에서도 그들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간다. 이미 성해방(性解放)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간 이후였다. 청년들은 자유로운 성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헤리엇은 꿋꿋이 혼전 순결을 지키며 좋은 어머니가 되기를 꿈꾼다. 데이비드는 부모가 이혼한 뒤 각각 새 가정을 꾸리는 바람에 외롭게 성장했다. 처음부터 서로 끌린 두 사람에게는 공동의 목적이 있다. 그들만의 화목한 가정을 꾸리려는 것.
여덟 명의 아이를 가지려는 그들 부부의 희망을 주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이미 그 시기에도 다산(多産)은 양극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무지의 소산이거나 부의 상징이거나. 데이비드의 어머니이자 학자인 몰리는 ‘가정이 뒷배경으로 물러나 있는 그런 생활을 지지’했다. 데이비드의 아버지 제임스 역시 ‘사람들은 가족생활이 최고라고 세뇌를 당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데이비드 부부는 부모 세대보다도 더 보수적인 생각을 지닌 구닥다리 청년들이다.
그들은 무리해서 저택을 구입하고 연이어 아이들을 낳는다. 아들 루크와 딸 헬렌과 제인이 태어난다. 넷째인 폴이 태어나고도 그들은 아이를 더 낳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 토끼처럼 아이를 낳아대면서 그들은 부모의 지원에 의존한다. 부자인 데이비드의 아버지가 그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헤리엇의 어머니는 육아를 돕는다. 경제적으로 빠듯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귀엽고 착했다. 집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의 저택은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행사마다 가족들이 모여서 북적대는 장소가 되었다. 데이비드와 헤리엇은 그들이 꿈꾸던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고 생각했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헤리엇의 행복에는 오만함이 묻어있다. 언니 사라가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이를 출산하자 해리엇은 사라 부부의 불화 때문에 그런 아이가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진료하는 산부인과 의사에게 우월감을 느낀다. 그의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다섯째 아이를 임신하면서 사라의 행복은 무너진다. 이 아이는 태동부터가 심상치 않다. 임신 기간 내내 헤리엇은 태아의 발길질 때문에 고통받는다. 헤리엇은 ‘원수를, 자신 안에 있는 야만적인 것’을 조용하게 만들려고 애쓰며 진정제에 의존한다.
임신 기간이 길어질수록 헤리엇은 갖가지 증상으로 고통받는다. 마침내 그녀는 부엌칼로 자기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는 상상을 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난다. 몸무게가 11파운드나 되는 벤은 전혀 아기처럼 보이지 않는다. 두툼한 어깨와 구부정한 모습, 노르스름한 피부, 사람들은 그가 ‘요정’이나 ‘도깨비’처럼 보인다고 수군댄다. 성장할수록 벤은 형제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란다.
벤이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은 외모뿐만이 아니다. 그는 난폭하고 잔인하며 공감 능력이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개와 고양이를 죽인다. 지극히 ‘정상적인’ 부모 아래 기괴한 싸이코패스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벤이 그렇게 태어난 것은 지극히 우연한 일이다. 부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징벌적 의미는 없다. 헤리엇의 언니 사라가 우연히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이를 낳은 것과 마찬가지다. 데이비드는 자조적으로 말한다.
‘좋아, 좋아 이번에는 아마도 유전자들이 특별한 것을 만들었나 보지.’-본문 73쪽
아이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며 데이비드의 부모는 벤을 요양소에 보내기를 권한다. 마침내 벤이 요양소로 옮겨졌다. ‘그 다음날부터 가족들은 물에 불린 종이꽃처럼 피어났다.’ 아이들은 활기를 되찾고 저택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그러나 헤리엇은 벤을 마음에서 지울 수 없다. 모성애나 온정 때문이 아니라 죄의식과 공포감 때문이었다. 마침내 요양소를 찾아간 헤리엇은 구속복을 입고 약에 취해있는 벤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가정에는 다시 긴장과 공포가 감돈다.
시간이 흐른다. 명절마다 북적이던 집은 고요하다. 벤을 두려워하는 친지들이 발길을 끊은 탓이다. 형제들 역시 저택을 떠난다. 첫째는 데이비드의 아버지에게, 둘째는 데이비드의 어머니에게로 도망친다. 셋째는 외할머니 집으로 피신한다. 헤리엇이 벤에게 신경쓰는 동안 보살핌을 받지 못한 넷째는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데이비드는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을 벌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며 ‘가정적인 남자로서의 자아를’ 잃는다. 행복했던 가정은 이렇게 해체되어 갔다. 폭주족을 따라 집을 나간 벤은 사회로 나아간다. 데이비드와 헤리엇 부부는 텔레비전 화면으로 벤이 런던의 폭동에 가담한 장면을 지켜본다. 이제 그의 폭력성은 사회를 향할 것임을 암시한다.
저자는 놀라울 만큼 날카로운 필치로 섬뜩하고 이질적인 괴물을 창조했다. 저자는 벤이 지닌 폭력성과 야만성이 이미 ‘인간성’에 포함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성과 도덕에서 인간성을 찾으려는 태도에 실소를 보낸다. 또 어떤 부모도 자식이라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디선가 끼어든 선대의 유전자가 조합되어 어떤 괴물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헤리엇은 다른 자식들은 사랑했지만, 벤에게만큼은 애정을 줄 수 없다. 도리스 레싱은 이 소설을 통해 가족 이데올로기와 모성애 신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린 벌 받는 거야…(중략)…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159쪽
‘다섯째 아이’는 엉뚱하게도 가디언지가 선정한 세계 5대 공포소설에 포함되었다. 이 소설을 단순히 장르문학으로 구분하기는 적절치 않아 보이지만, 책장을 덮으며 독자들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한때 행복했던 가정이 새로운 가족 구성원에 의해 파괴되어가는 과정은 그만큼 무시무시하다. 더 두려운 사실은 이런 종류의 비극이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삶은 늘 의외성으로 가득하며 예상치 못한 자식의 성정(性情) 역시 의외성의 일부이다. 그리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기 마련이다.
도리스 레싱은 1919년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에서 태어나,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짐바브웨로 이주한다. 타이피스트, 전화교환원으로 일하면서 독학을 시작한다. 두 번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1949년 런던으로 이주해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한다. 1950년 첫 장편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를 펴낸다. 이후 ‘마사 퀘스트’, ‘금색 공책’, ‘런던 스케치’, ‘19호실로 가다’ 등 5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도리스 레싱은 인종, 계급, 식민지 문제 등 수많은 사회 문제를 작품에 녹여 넣은 작가로 유명하다. 아파르트헤이트 저항 운동, 반핵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서머싯 몸상, 메디치 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작가이기도 하다. 2013년 런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