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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Nov 08. 2023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

도시의 삶에 지친 당신에게

아파트 비상계단에 앉은 오드리 헵번이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른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등장하는 명장면이다. 달빛은 강물처럼 뉴욕의 밤하늘을 흐르고, 오드리 헵번이 분한 홀리 골라이틀리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애수가 깃들었다. 홀리 골라이틀리와 그녀의 이웃인 무명작가 폴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돈 때문에 원하지 않는 사람과 사귀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순수를 잃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물질보다 진실한 사랑을 택하며 그들은 맺어진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표지와 저자 트루먼 커포티


트루먼 커포티가 쓴 원작에 등장하는 뉴욕은 영화처럼 화려하고 아름답다. 홀리 골라이틀리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예술가, 명사들로 붐빈다. 그러나 영화와 같은 달콤한 끝맺음은 없다. 대도시 뉴욕은 결코 이 아름다운 방랑자에게 온정을 베풀지 않는다. 다정하던 친구들은 비정하고 속물적인 면면을 드러낸다. 범죄에 엮인 여배우는 더는 남자들의 숭배 대상이 될 수 없다. 몰락한 홀리는 이제 가십과 추문으로 소비될 뿐이다. 뉴욕의 밤하늘에는 문 리버 (moon river)가 흐르지 않는다. 뉴욕의 낭만은 티파니의 푸른 상자를 열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사치다.
 
홀리 골라이틀리 같은 여자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들은 부평초처럼 도시에서 도시를 떠돈다. 유명 클럽에 드나들고, 화장을 고치러 갈 때마다 50달러를 팁으로 받는다. 그들은 때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한다. 파티에서는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일정한 수입 없이도 호화롭게 살아간다. 프랑스의 살롱계에서 그들은 코케트(coquette)라 불렸고, 우리나라에서는 기생이라 불렸다. 애교와 화술, 세련된 차림새로 무장한 그들은 부유한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아 화려하게 사는 것이 목표다. 트루먼 커포티는 홀리가 콜걸이 아니며, 일종의 미국식 게이샤라고 말한 바 있다. 창부(娼婦)와 배우 사이 어딘가에 홀리는 위태롭게 서 있다.

영화 속 홀리 골라이틀리와 소설에 등장하는 홀리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두 인물 다 독립적이며 자유를 사랑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홀리는 영화의 주인공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한 인물이다. 누구에게도 자신을 다 보여주지 않는 동시에 솔직하고 천진난만하다. 세련되고 신비한 모습 뒤에 고독하고 연약한 자아가 숨겨져 있다. 난처한 상황에서는 프랑스어를 쓰고, 연인에게 온 편지(이별을 알리는 내용임이 분명한)를 읽기 전에 립스틱을 바른다.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는 점이 홀리가 지닌 최고 매력이다.



몸은 내주어도 마음은 주지 않는 여성에게 남자들은 매료되는 법이다. 홀리를 에워싼 남자들은 부유한 명사들과 영화계 거물, 명문가의 외교관이다. 소설의 화자이자 무명작가인 ‘나’ 역시 홀리에게 푹 빠졌다. 저자의 분신인 ‘나’는 동성애자임이 암시되는데, 홀리가 지닌 매력은 단지 성적인 측면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홀리는 부유한 남자를 통한 신분 상승을 꿈꾸지만, 사랑하지 않는 남성과는 동침하지 않는다. 이익을 위해 친구를 배신하지도 않는다. 정작 그녀는 자신에게 친구가 없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싱싱 교도소에 수감된 마약상 역시 홀리에게는 ‘좋은 아저씨’ 일뿐이다. 세속의 기준이나 도덕률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그녀가 세운 윤리에 충실함으로써 홀리는 마음속 순수를 지킨다. 홀리는 ‘진짜 거짓말쟁이니까 거짓말쟁이가 아니’며 ‘자기가 믿는 구라를 다 진짜라고 생각하는’ 못 말리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하다.

힘든 유년기를 보낸 홀리는 일찍 개화한 성적 매력으로 주목받는다. 뭇 남성의 시선을 한 몸에 받지만, 진정한 사랑은 좀처럼 얻지 못한다. 그녀가 ‘심술궂은 빨강’이라 부르는 우울과 불안으로 고통받는다. 이 순수한 팜므파탈은 누군가를 연상하게 한다. 위태롭고도 연약한 매력의 소유자이며 짧은 머리를 금색으로 물들인 메릴린 먼로는 홀리와 똑 닮았다. 저자 역시 오랜 친구 메릴린 먼로를 떠올리며 소설을 썼다고 고백했다. 트루먼 커포티는 영화의 주연으로도 메릴린 먼로를 추천했다. 하지만 소설보다 더 말랑말랑해진 영화(저자는 풍부하고 추해야 하는 내용이 얄팍하고 예뻐졌다고 표현했다)는 청초한 여배우 오드리 헵번을 주인공으로 낙점했다.




홀리는 언제나 여행 중이다. 우편함에는 ‘홀리데이 골라이틀리 양, 여행 중’이라고 인쇄된 명함이 꽂혀있다. 집에는 변변한 가구조차 없다. 여행 가방과 풀지 않은 상자, 축음기, 선반에 반쯤 찬 소설이 전부다. 늘 떠날 준비가 되어있기에 기르는 고양이에게조차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그녀가 지닌 부에 대한 욕망은 아이러니하다. 홀리의 허영은 어린 시절의 허기와 결핍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존심을 잃지 않는다. 영화 스타가 될 기회를 차버린 이유 역시 배우로 유명해지려면 자존심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홀리의 인생이 구렁텅이로 떨어진 이유도 그녀가 버리지 못한 자존심 때문이다
 
"난들 부자고 유명해지는 게 싫겠어요?…(중략)…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난 내 자존심이 졸졸 따라왔으면 좋겠어요. 어느 맑은 날 아침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는다고 해도 여전히 나이고 싶어요."

                                                 -본문 55쪽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하나의 긴 여행이다. 가져갈 수 있는 짐은 한정적이고, 만남은 곧 이별로 이어진다. 언젠가는 종착지에 다다르며 남는 것은 오직 추억뿐이다.
 
티파니에서 파는 것은 보석이 아니라 환상이다. 환상을 좇던 사람들은 냉혹한 현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사실 인생이란 여행보다는 고된 유랑에 가깝다. 그러나 때로 맘 맞는 동반자가 생기고, 털북숭이 고양이와 함께 걷기도 한다. 다이아몬드는 갖지 못했으나 그보다 더 반짝이는 달빛을 얻을 수 있다. 홀리는 어느 가을 뉴욕을 떠나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낙엽이 다 지기 전에 여행을 떠나고 싶다. 홀리처럼 매력적인 동반자와 함께라면 더 좋을 것 같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여행 중’이라고 인쇄된 명함을 주고받고 싶다.

저자 트루먼 커포티는 1924년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앨라배마 친척집에 맡겨졌다. 그 시절 만난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와의 우정은 유명하다. 고등학생 때 잡지 ‘뉴요커’의 사환으로 일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을 발표하자마자 전후 세대 미국 문단을 이끌 총아로 떠오른다. 소설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더욱 유명해진다. 1966년 실제로 있었던 살인 사건을 조사한 끝에 대작 ‘인 콜드 블러드’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후 새로운 작품을 출간하지 못하고 알코올과 약물 중독에 시달리다가 1984년 사망한다. 트루먼 커포티의 인생은 여러 면에서 자신이 창조한 주인공 홀리의 삶과 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나 우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타고난 재능과 실력으로 주목받았으나 불안과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뒤,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비슷하다. 2014년 뉴욕공립도서관에서 10대 시절에 쓴 단편들이 발견되면서 이 천재 작가는 다시 한번 주목받는다.
(박현주 옮김, 시공사, 2013)


도시의 삶에 지친 당신을 위한 처방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한 자리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살았다. 현대인의 삶은 예측할 수 없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다. 도시의 익명성은 편안함을 주지만, 사람들 사이에 흐르던 끈끈한 정이 그립다. 그러나 인생은 홀로 떠나는 여행과 같다. 오래 머물고 싶어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 함께 걷던 길동무를 떠나보내야 할 때도 있다. 홀리 골라이트처럼 발걸음을 가볍게 하자. 짐가방과 책 몇 권, 고양이 한 마리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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