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한 자유
흔히 삼포 세대라고들 한다.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청년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치솟는 물가와 불안정한 일자리로 마음 졸이는 그들에게 결혼이란 사치재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할 ‘자유’가 주어진 첫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까? 결혼과 출산은 포기한다고 치자. 그러나 관계와 사랑, 섹스에 관한 욕망까지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엄밀히 말해 포기라기보다 박탈에 가깝다. 우리 모두 불편한 진실을 알고 있다. 연애 시장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장 경제 체제에서 자유를 누리는 이는 몇몇에 불과하다. 연애 시장에서의 자유는 ‘매력 금수저’에게만 보장된다. 소수의 ‘알파 메일’이 여러 여성과 즐길 때, 평범한 남성은 경쟁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여성이라고 다를까. 젊고 아름다운 여성만이 우월한 수컷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소설 ‘투쟁 영역의 확장’은 연애와 우정을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한 자유를 이야기한다. 소설에서 자유란 폭력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투쟁 영역의 확장’ 표지
근대 시민 사회에서 말하는 ‘자유’는 개인이란 주체 없이 성립할 수 없다. 전근대인(前近代人)에게 자유로운 삶이란 피안의 세계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절대자에 대한 믿음, 공동체의 결속력이 그들을 현실에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그들은 적어도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던 셈이다. 소설의 주인공 ‘나’에게 자유란 불안과 권태, 허구를 뜻한다. ‘나’는 직장 동료 장이브 프레오와 ‘인생 전반에 대한 진지한 대화도 나누었고, 때로는 관능적인 포옹’도 나누는 사이다. 그러나 그들 관계는 표피적이고 피상적이다. ‘실망과 환멸이 곧바로 처음의 열렬함을 밀어내’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장이브 프레오는 ‘최대한의 자유는 최대한의 선택 가능성과 일치’한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다. 그러나 ‘나’는 그가 ‘아무런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확신한다. 역설적이게도 인간관계의 소멸은 자유의 증가와 비례한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산뜻한 관계에 깊이와 헌신이 끼어들 리 만무하다.
연애 시장에 침투한 자유가 불러들인 결과는 끔찍하다. 성해방(性解放)과 자유연애를 통해 현대인은 무제한의 섹스를 즐길 자유가 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성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연애 시장의 차별화는 ‘돈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지만 그 또한 ‘냉혹한 차별 체계’다. 소설은 ‘매력 흙수저’가 느끼는 자괴감과 수치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의 직장 동료 라파엘은 스물여덟 나이에 아직 숫총각이다. 사회적으로는 잘 나가는 젊은이지만, 연애 시장에서는 안 팔리는 매물이다. 라파엘의 외모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무자비하고 가차 없다. 빠르게 진행되는 탈모증과 뚱뚱한 몸은 ‘개선될 여지’나 있지만, ‘그의 얼굴은 가망이 없다.’ ‘물소나 두꺼비’를 닮은 얼굴은 ‘아름다움의 정반대’다.
저자는 연애 시장에 우선하는 자본은 성적 매력임을 강조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둘 중 하나다. 예쁘거나 예쁘지 않거나. 슬프게도 매력이란 도덕, 혹은 정치적 공정성과는 아무 상관없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 선과 악으로 사람을 나누는 일은 터무니없다. 사람들은 매력적이거나 혹은 지루하다. ‘나’는 정신분석을 받는 여성과 페미니스트들을 비웃는다. 삶이란 복잡다단하고 세상은 부조리한 법이다. 삶의 모호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에게 매력이란 없다.
저자는 한 사람이 지닌 외모가 어떻게 그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지 낱낱이 해부한다. ‘나’는 라파엘의 외모가 ‘그의 인격의 근본 문제’라고 믿는다. 라파엘은 여성에게 집적대지만 늘 거부당한다. 반복된 경험에서 비롯된 상처로 인해 그는 더욱 매력을 상실한다. 일종의 악순환이랄까. 또 다른 여성 동료 카트린 역시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녀가 공격적인 이유를 그녀의 외모에서 찾는다. 그러나 매력 없는 남녀에게도 욕망은 있다. 라파엘과 카트린은 끊임없이 성적 결핍감에 시달린다. 카트린은 ‘나’를 유혹하며 ‘농락당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 택하는 성 전략은 다르다. 현대 여성 역시 성에서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기에 카트린은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거부당할 염려는 남성에 비해 덜하지만, 여성은 늘 유혹하는 위치에 있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오늘날 여성의 자아존중감은 유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는지에 달려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페니스는 언제든지 잠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질이 비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녀의 상황은 내가 보기에 몹시 절망적이었다.’
-본문 69쪽
현대 사회에서 섹스란 돈처럼 누구나 탐내는 재화가 되었다. 미디어는 성애(性愛)에 대해 과장하고 미화한다. 연애와 섹스는 ‘인생이 경이롭고 신나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간다. ‘성욕도 없고, 야망도 없고, 별다른 기분 전환 거리도 없는 상태’는 ‘생명의 고갈’을 뜻하기 때문이다. 라파엘 같은 ‘모태 솔로’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사회에 의해 강화된다. 현대인은 늘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괴로워한다. 그들을 비참하게 하는 원인은 섹스에 대한 결핍 자체가 아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마음껏 향유한다는 오해가 그들을 괴롭힌다. 상담사는 ‘나’에게 최근 언제 성관계를 했는지 묻는다. 2년간 성관계가 없었다는 ‘나’의 대답에서 상담사는 우울의 원인을 찾는다. 섹스는 이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인생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에 좌절하는 ‘나’와 달리 라파엘은 여전히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완전 자유 섹스 체계에서 어떤 이들은 정말로 다양하고 짜릿한 성생활을 즐기지만 다른 이들은 자위행위와 외로움 속에서 늙어간다.’ ‘나’와 나이트클럽에 놀러 간 라파엘은 이번에도 여성에게 접근하는 데 실패한다. 라파엘이 점찍은 여성은 매력적인 남성과 하룻밤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라파엘은 최후의 순간까지 ‘투쟁의 욕망과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 천덕스러울 정도로 끈질긴 라파엘의 욕망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와 달리 비록 실패할지라도 라파엘은 끝까지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비록 연이은 실패 끝에 비참한 몰락을 맞을지라도.
라파엘이 떠난 뒤 ‘나’의 정신세계는 급격하게 붕괴한다. 정신과 치료를 거쳐 요양소에 머물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껏 삶을 거부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도 인생에 대해 진지했다. 부조리와 위선, 추함, 상처로 가득한 인생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이다. ‘나’는 ‘투명하고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어떤 막으로 세상과 차단되어 있는 것’ 같다. 마침내 ‘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를 얻는다.
나는 이론적인 파라다이스에서 세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있는, 나를 닮은 유령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를 만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이제는 끝났다.
-본문 222쪽
현대인은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는 ‘나’와 진정한 ‘나’와의 통합을 원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분열된 주체는 그대로 남아있고, 결핍과 고통 역시 채워질 수 없다. ‘자기희생적인 융화’가 사라지고 ‘인생의 목표’가 없어짐을 인정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평안을 얻는다.
1994년에 나온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고민은 한국 사회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주인공이 예견한 대로 인간관계는 파편화되었다. 자본주의적 가치는 삶의 구석구석에 파고들었다. 이제 한국 사회는 성(性)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성애(性愛)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경제적 등급뿐 아니라 매력 자본으로도 차별화된 인간은 결핍감과 고독에 시달린다. ‘온갖 화려한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다. 21세기가 어떨지 뻔하다.’란 ‘나’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어떤 독자는 매력 없는 인물에 대한 저자의 독설에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신은 불공평을 원하셨지, 불의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불공평은 곧 차별로 연결되는 법이다. 미셸 우엘벡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냉소적이고 음울하다. 세상은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저자의 읊조림이 들리는 듯하다.
저자 미셸 우엘벡은 1958년 프랑스의 해외 영토 레위니옹 섬에서 태어났다. 국립농업학교에서 농업경제학과 정보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 전산 관련직으로 일했다. 1985년 시인으로 데뷔한 이래, 1996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했다. 1994년 첫 장편소설 ‘투쟁 영역의 확장’을 발표했다. ‘소립자’ ‘플랫폼’, ‘어느 섬의 가능성’, ‘지도와 영토’, ‘복종’, ‘세로토닌’ 등을 썼다. 2010년 소설 ‘소립자’로 공쿠르상을 받았다. 2015년 소설 ‘복종’을 발표했는데, 2022년에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다는 내용이다. 마침 이 소설이 발표된 날 이슬람 강경 세력에 의해 프랑스에서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발생했다. 소설을 통해 자본주의, 성, 인간 본성, 정치 등 다양한 문제를 다뤄왔다.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발표하는 작품마다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용경식 옮김, 열린 책들, 2003, 원제 Extension du domaine de la lut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