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케이디와 레지나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사와 장면은 갖가지 밈이나 gif로 재생산되어 소비됩니다. 영화가 젊은 관객에게 발휘하는 영향력은 여전합니다. 얼마 전, 뮤지컬로 리메이크한 작품이 제작되었지만, 원작의 인기를 따라잡지는 못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무해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소녀들이 악녀라고요? 영화의 원제는 ‘mean girls'입니다. ‘못된 계집애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네요. 이 소녀들은 문제아도 ‘일진’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쁘고 인기도 많은 데다가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입니다. 이 깜찍한 소녀들이 서로 음해하고 헛소문을 퍼뜨리고 육탄전까지 벌입니다.
10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로맨스 영화를 즐기는 관객은 청소년만이 아닙니다. 성인 관객 역시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보며 가슴 졸입니다. 오해나 자존심 때문에 그들이 이별하는 장면이 나오면 안타까워하지요. 역경을 이겨낸 연인들이 맺어질 때면 갈채를 보냅니다. 첫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순수하고 풋풋한 감정에 깊이 동화되기 때문입니다.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teen romantic comedy)는 로맨스 영화의 서브 장르로 자리 잡았습니다.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전형적인 틴 무비(teen movie)의 화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순진하고 촌스럽던 주인공이 자신이 지닌 미모의 힘을 각성하고 ‘인싸’ 무리에 합류합니다. 짝사랑하던 남학생과도 ‘썸’을 타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주인공을 질투하는 ‘여왕벌’ 소녀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역경을 이겨낸 주인공은 남학생과 맺어지고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장르가 지닌 빤한 공식을 따르면서도 영화는 참신함을 잃지 않습니다. 진부한 클리셰와 손발이 오그라드는(?) 설정으로 관객을 민망하게 하는 몇몇 로맨틱 코미디와는 거리가 멉니다.
지나간 학창 시절은 미화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 청소년기가 즐겁고 유쾌하기만 했을까요? 요즘 문제가 되는 학원 폭력이나 따돌림으로 고통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잘나가는’ 무리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습니다.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란 어렵습니다. 늘 ‘쿨하게’ 보여야 하고 유행의 선두를 이끌어야 합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어른들이 고급 차와 연봉으로 서로를 ‘구분 짓기’할 때 10대들은 그들만의 방식을 동원합니다. 치어리더는 축구부 주장과 사귀고 평범한 학생들은 그들을 선망합니다. 시녀들은 ‘여왕벌’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녀를 모방합니다. 수학 경시 대회에 나가는 학생들은 괴짜(nerd) 취급받습니다. 만만해 보이거나 무리에게 찍히면 끝장입니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있을 법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냥 순수한 주인공과 완전한 악당은 없습니다. 주인공 케이디 헤론(린지 로한 粉) 역시 선량한 소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동물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성장한 케이디가 일리노이의 고등학교로 전학 오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홈스쿨링(home schooling)을 하던 케이디에게 학교는 아프리카의 정글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글의 규칙을 모르는 케이디는 별종 취급받습니다. 10대에게 인기 있는 스타의 이름도(영화에서는 애쉬튼 커쳐가 거론됩니다) 유행어도 모릅니다. 그런 케이디를 받아준 무리 역시 별종입니다. 레즈비언으로 소문난 재니스와 ‘못 말리는 게이’ 데미안이 그녀의 친구가 됩니다. 재니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레지나를 병적으로 싫어합니다.
레지나 조지(레이첼 맥아담스)는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금발에 예쁜 얼굴, 늘씬한 몸매를 지닌 부잣집 딸이라는 설정은 여느 10대 영화의 여왕벌 속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까지 좋은 모범생이라면 완벽한 여학생이겠죠? 그러나 레지나는 간단한 나눗셈도 못 하고 버터가 탄수화물이냐고 물을 정도로 무식합니다. 성격 역시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친구들을 시녀 취급합니다. 레지나의 인기를 설명하려면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미모로는 친구 캐런(아만다 사이프리드) 역시 레지나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같은 부잣집 딸이라지만 친구 그레첸(레이시 샤버트)의 아버지는 부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레지나는 그들이 갖추지 못한 카리스마와 교활함이 있습니다.
레지나는 케이디에게 흥미를 느낍니다. 재니스의 계략으로 레지나와 가까워진 케이디 역시 레지나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오히려 재니스가 왜 그토록 레지나를 미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잔인한 방법으로 레지나에게 첫사랑을 빼앗기고 나서야 케이디는 레지나가 악녀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복수가 시작됩니다. 재미있는 점은 케이디가 레지나를 증오하면서도 여전히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이상하게도, 난 레지나와 어울리며 그 애가 싫은 동시에 그 애가 날 좋아하기 바랐어요.’라는 케이디의 독백이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말해주지요. 레지나는 태생적으로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를 택합니다.
케이디, 레지나, 캐런, 그레첸, 이들 여왕벌 무리의 우정은 얄팍합니다. 물론 인간관계에는 필연적으로 질투와 시기, 배신이 끼어들기 마련입니다. 또 청소년기는 완벽한 우정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씁쓸한 현실 속 관계를 받아들이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애증’이란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뒤틀려 있습니다. 영어권 신조어로 프레너미(frienemy)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친구(friend)와 적(enemy)의 합성어로 사랑과 미움을 오가며 유지되는 친구 관계를 뜻합니다. 이런 관계는 여성 사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남자들이 여성의 우정을 가볍게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현상이 ‘여자의 적이 여자라서’일까요? ‘베스트 프렌즈’라는 책의 저자 테리 앱터는 이런 현상을 문화적 이유에서 찾습니다. 여자친구들 간의 미움은 서로 증오해서라기보다는 선망과 불안이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남자들의 우정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싫은 녀석’을 친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의리’로 뭉친 관계이지만, 마음을 터놓는 일은 없습니다. 그저 감정을 나누는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의 관계는 더 복잡합니다. 무슨 일이건 공감받기를 원하고 감정적으로 깊숙이 얽혀있습니다. 그만큼 가깝던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끼면 상처 역시 큰 법이지요. 남자들처럼 치고받으면 오히려 갈등은 쉽게 해소됩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수동적이고 교묘한 공격을 택하지요. 서로 이간질하고 험담을 나누고 은밀한 방식으로 따돌립니다.
케이디는 점점 레지나를 닮아갑니다. 레지나의 말투와 옷차림을 따라 하고 괴짜 친구들을 멀리합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지요? 슬슬 케이디의 악녀 기질이 드러납니다. 레지나가 바람피우는 사실을 폭로해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합니다. 다이어트에 좋은 음식이라고 속여서 기아에게 주는 구호 식품을 먹입니다. 덕분에 레지나는 날씬한 몸매를 잃게 되지요. 레지나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레지나는 케이디에게 ‘순수한 척’하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겉과 속이 똑같은 레지나와 달리, 케이디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선량하고 순수한 겉모습 뒤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 때문입니다.
‘착한 척’하는 위선자는 친구들 사이에서 경멸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케이디는 방황을 끝내고 본래의 선한 성품을 되찾습니다. 전교생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한층 성숙해집니다. 레지나 역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새로운 방법을 찾습니다. 뒤에서 교묘하게 사람을 조종하는 대신 운동팀에 가입해 스트레스를 해소합니다. 케이디와 레지나는 이제 ‘절친’은 아니지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친구로 남습니다.
각본을 쓴 티나 페이는 수학 교사 샤론 노베리 역할로 출연합니다. 노베리 선생님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진정한 ‘어른’ 중 한 사람입니다. 여자애들끼리 서로 ‘걸레’니 ‘헤픈 여자’니 부르는 것은 남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일깨워줍니다. ‘성적 순결성’을 문제 삼는 일은 오히려 여자들 사이에서 흔합니다. 남자들이 만든 이중 잣대를 부정하면서도 서로를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하지요. 노베리 선생님은 이런 태도가 모순적이며 비열한 행동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행보는 맡은 역할과 달라졌습니다. 주연을 맡은 린지 로한은 깜찍한 외모와 훌륭한 연기력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러나 약물 문제와 자기 관리의 실패로 할리우드의 문제아로 전락합니다. 악역을 맡았던 레이첼 맥아담스는 로맨스물의 순수한 주인공 역할을 도맡습니다. 금발의 백치미 소녀였던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맘마미아’의 조연을 맡아 스타덤에 오릅니다. 흥행과 작품성 모두 거머쥔 이 영화는 소녀들의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수작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소녀들의 성장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