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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pr 28. 2024

우아한 그녀들 세상을 매혹하다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에 등장하는 미스 마사

“나는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다. 유혹을 제외하고는.”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명언 중 가장 유명한 말이 아닐까요. 유혹자는 늘 비난받아왔습니다. 뱀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유혹했습니다. 그 결과 인류는 에덴에서 쫓겨나 고달픈 세상을 영원히 유랑합니다. 은둔하며 기도하는 수도사를 찾아오는 이는 여성으로 변신한 악마입니다. 이처럼 여성은 신실한 남성을 유혹해 타락시키는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여성이란 우정의 적, 피할 수 없는 고통, 필요악, 자연스러운 유혹, 매혹적인 재앙, 예쁜 색으로 칠해진 악이다’ 옛 수도사 요한네스 니더가 남긴 말입니다. 매혹적인 재앙이라니! 비록 여성 혐오에서 비롯한 말이지만, 유혹자에 대한 적절하고도 재미있는 비유입니다.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스틸 컷

그러나 모든 유혹자가 여성인 것만은 아닙니다. 카사노바는 여성의 마음을 훔치는 데 능숙한 바람둥이이자 매력이 넘치는 유혹자였습니다. ‘여성이 먼저 꼬리 쳤다’라는 말은 남성의 폭주하는 성욕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프레임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을 매혹하고 또 매혹당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매혹당한 사람은 그저 수동적 존재로 남지 않습니다.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감독 소피아 코폴라)에 등장하는 악녀들은 매혹당하고 매혹하기를 반복합니다. 그런 행위를 통해 그들의 위치는 역전을 거듭합니다.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들도 아름답고 우아한 그들에게 매혹당합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3년째 접어드는 1864년입니다. 일곱 명의 여성이 남부의 한 저택에 머물고 있습니다. 연회와 사교의 공간이었던 저택은 이제 여학교로 쓰입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 에이미가 숲에서 버섯을 따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에이미는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북군 존 맥버니(콜린 파렐 粉)를 발견하고 저택으로 데려옵니다. 금남의 집에 들어온 북군 병사는 묘한 긴장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에이미가 존을 발견한 장소는 한낮에도 나무 그늘로 어둑어둑합니다. 북군 병사는 어두운 숲처럼 미지의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에게 존은 위험한 남성성을 지닌 낯선 이(stranger)입니다. 낯선 이(stranger)란 단어는 영화 내내 등장합니다. 낯선 타인은 늘 위협적인 동시에 우리를 매혹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장인 미스 마사(니콜 키드먼)는 곧 떠날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의 이름조차 알려고 들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책무 때문에 그가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만 보살피기로 하지요. 그러나 젖은 수건으로 그의 벗은 몸을 씻겨주는 미스 마사의 손은 떨립니다. 비록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아름답고 탄탄한 그의 육체는 미스 마사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합니다.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스틸 컷

존은 곧 미스 마사뿐 아니라 저택에 사는 모든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존은 잘생긴 데다가 말솜씨 역시 좋습니다. 게다가 전쟁 이후 젊은 남성을 접한 일이 없는 여성들에게 그의 등장은 가뭄 속 단비 같습니다. 존을 사이에 두고 여성들의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집니다. 전쟁 전에 입던 예쁜 옷을 꺼내 입습니다. 선생님의 귀걸이를 몰래 꺼내 귀에 거는가 하면, 서로 존을 부축하려고 야단입니다. 깜찍한 10대 소녀 알리시아(엘르 패닝)는 그에게 도발적 눈빛을 흘립니다.      


존은 타고난 매력으로 그들 모두를 유혹합니다. 존은 그들이 각자 듣고 싶은 말을 들려줍니다. 그를 유혹하다가도 돌연 차갑게 구는 미스 마사에게는 ‘당신이 필요한 건 남자’라며 속삭입니다. 자신을 구해준 에이미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불러줍니다. 사실 존에게 유혹의 성패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심각한 상처를 입은 탈영병인 존으로서는 포로수용소에 가는 순간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존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성은 교사로 일하는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 에드위나는 신비하고 미묘한 매력을 풍깁니다. 에드위나 역시 존이 등장하는 순간 이미 그에게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존이 에드위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남부 숙녀 에드위나가 존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음은 사실입니다.

     

몸이 점점 회복되어 가자 존은 힘든 정원 일을 해치우며 그들에게 ‘남자’가 필요한 이유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미스 마사는 건강을 회복한 그에게 며칠 내에 저택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존은 에드위나와 서부로 도망칠 계획을 세웁니다. 순진한 에드위나는 그의 꼬드김에 넘어갑니다. 그러나 에드위나가 그의 방을 찾았을 때, 그는 알리시아(앨르 패닝)와 함께 침대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존은 에드위나에게 뛰어가 변명하지만, 에드위나는 그를 밀쳐냅니다.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진 존의 나아가던 다리가 부러집니다. 알리시아는 존이 그녀를 겁탈하려 했다며 상황을 모면합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존을 유혹한 이는 알리시아임이 분명합니다.      


존의 부러진 다리에서는 출혈이 멈추지 않고, 미스 마사는 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결단을 내립니다. 클로르포름과 톱을 가져와 그의 다리를 자르는 미스 마사는 외과 의사를 연상케 합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존은 비명을 내지릅니다. 육체의 온전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남성성의 거세를 뜻합니다. 여성들은 미치광이로 변한 존을 방에 가두어놓습니다. 그러나 존은 방을 빠져나와 미스 마사의 총을 훔쳐 그들을 위협합니다. 에이미가 애지중지하는 애완 거북이를 집어던지고 천정에 총을 쏘아 샹들리에를 떨어뜨립니다. 이제 그들 앞에 선 존은 나쁜 남성성을 지닌 야수에 불과합니다. 친구가 되었던 낯선 이(stranger)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악의 심연으로 변합니다.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스틸 컷

에드위나는 존을 따라가 그와 동침합니다. 존이 에드위나를 다루는 방식은 지극히 거칠고 폭력적입니다. 에드위나가 그와 정사를 나눈 이유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일 수도 있고, 여전히 그를 사랑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와의 동침이 존의 폭력성을 누그러뜨릴 유일한 길이라고 여겨서일지도 모릅니다. 존과 에드위나가 함께 있는 동안, 여자들은 그를 없앨 방법을 궁리합니다. 그의 생명을 구한 에이미가 그의 생명을 거둬들일 책임자로 지목됩니다. 에이미는 그를 발견한 장소에 가서 독버섯을 줍습니다.  


 존을 떠나보내기 위한 만찬이 벌어집니다. 식탁 아래에서 에드위나와 존이 손을 꼭 잡은 장면은 그들이 함께 떠나기로 했음을 암시합니다. 독버섯이 든 요리를 담은 그릇을 존에게 전달할 때, 여성들이 주고받는 눈빛과 표정 연기는 압권입니다. 그들의 계략을 알 리 없는 에드위나는 존이 권하는 버섯 요리를 접시에 담으려 합니다. 그때 에이미가 ‘언니는 원래 버섯을 싫어하잖아’란 말로 그녀를 말립니다. 에드위나는 순간 멈칫합니다. 그들의 공모를 눈치챘지만,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에드위나는 공범이 됩니다. 숨이 넘어가는 존을 보며 에드위나는 눈물을 흘립니다. 흰 천에 쌓인 존의 시신이 저택 밖에 버려집니다. 굳게 닫힌 철문을 배경으로 놓인 하얀 물체를 오브제처럼 비추며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거친 남성성에 대한 응징은 끝나고 그들은 평화롭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돈 시겔 감독이 1971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는 소피아 코폴라라는 작가의 손에서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전작과는 달리 영화는 철저하게 여성의 시각으로 그려집니다. 돈 시겔의 영화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존 맥버니 역을 맡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존 맥버니는 유혹의 주체이자 마초입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히스테릭한 여성들에게 살해당하는 희생자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미스 마사는 멀쩡한(?) 존의 다리를 자르는 여성으로 그려집니다. 돈 시겔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억압되고 뒤틀린 욕망으로 인해 한 남성을 파멸로 몰아넣습니다.      


그에 비해 콜린 파렐은 거친 남성성을 지녔지만, 더 섬세하고 교활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는 생존을 위해 여성들과 타협하고 그들에게 굴복합니다.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에서 여성들은 남성을 갈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남성은 전쟁과 같은 의미입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지만’ 여성 역시 전쟁에 참여합니다. 적군을 쏘아 죽이고 적군에게 강간당하기도 하며 그들에게 적개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적군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모여서 기도할 때, 미스 마사가 한 이 대사는 많은 진실을 함축합니다. ‘존 맥버니 상병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은 적군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면모는 ‘매혹당한 사람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성들이 지내는 저택은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메이드우드 저택입니다. 당시 유행했던 네오 클래식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합니다. 희고 우아한 건물은 건물 밖의 초록 숲과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저택은 별세계입니다. 남북전쟁이 한창인데도 전쟁의 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우아한 차림새로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를 먹거나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눕니다. 돈 시겔의 영화에 등장했던 흑인 노예 여성은 사라졌습니다.   

   

어떤 관객은 이 영화가 돈 시겔의 영화보다 역사의식과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소피아 코폴라는 의도적으로 영화에서 역사성을 제거했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을 영화에 부여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남북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다른 전쟁으로 바꿔놓아도 서사의 원형은 바뀌지 않습니다. 흑인 여성이 사라진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어설프게 드러난 정치성은 영화를 졸렬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감독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영화는 등장인물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 흘릴 뿐, 그들의 행동에 숨겨진 의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실 누군가의 욕망과 결핍을 완전히 설명할 방법이 있을까요? 남자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듯, 여성도 마음의 소리를 따를 뿐입니다.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 스틸 컷

미스 마사(니콜 키드먼)는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존 맥버니를 유혹하다가는 돌연 철벽(?)을 칩니다. 그에게 들려주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말은 그녀 자신을 향한 충고이기도 합니다. 미스 마사는 우아하고 현명합니다. 전쟁 중에도 결코 품위를 잃지 않습니다. 나쁜 남성성(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성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전쟁 전에 아버지와 함께했던 풍요로운 삶을 동경합니다. 전쟁터로 애인을 떠나보낸 아픈 경험도 있습니다. 그녀에게 남성은 든든한 보호자이자 쉼터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미스 마사는 남성에게 맡겼던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강인한 여성으로 성장합니다.  

    

‘매혹당한 사람들’에 등장하는 악녀들은 남성을 ‘가지고 놀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저 매력적인 남성에게 매혹당하고 다시 매혹하기를 즐길 뿐이죠. 그러나 위기가 닥치자 그들에게 숨어있던 악녀 근성이 발동합니다. 그들은 존 맥버니를 죽일 때도 우아함을 잃지 않습니다. 와인과 버터에 졸인 독버섯은 사형수에게 제공하는 마지막 만찬과도 같습니다. 고전적이고도 몽환적인 영상미를 구현하기 위해 영화는 디지털 방식이 아닌 필름으로 촬영되었습니다.      


영화 곳곳에 수 놓인 미장센은 소피아 코폴라 감독 특유의 섬세하고 우아한 감성으로 가득합니다. 존이 흘린 단추를 보관하는 에이미의 보석함은 그녀처럼 귀엽고 아기자기한 물건으로 가득합니다. 줄에 널어 말라가는 그들의 드레스는 햇볕과 바람의 냄새를 풍길 것 같습니다. ‘매혹당한 사람들’에 등장하는 악녀들은 전장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삶을 아름답게 영위하려 애씁니다. 영화에는 바느질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바느질은 규방과 아름다움,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정교함을 상징합니다. 존 맥버니의 시신에 입힐 수의를 만들 때도 꼼꼼하고 예쁘게 바느질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잠시 그들의 일상에 끼어든 존은 잘못 놓인 한 땀의 수처럼 제거됩니다. 악녀들에게 ‘나쁜 남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강인해지기를 택함으로써 숙녀들은 우아한 악녀로 거듭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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