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서블]의 애비게일(위노나 라이더)
17세기를 불과 몇 년 앞둔 미국 사회에서 마녀사냥이 일어났다고요? 인본주의와 계몽주의가 꽃피고, 과학 혁명이 가져온 변화로 세상이 들썩이던 시기가 아닙니까. 사람들이 진보와 이성이 지닌 힘을 칭송할 때, 세상 어딘가에서는 버젓이 야만이 자행되었습니다. 미국 세일럼 지방에서 벌어진 마녀재판을 통해 무려 19명이 사형당하고, 40여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정작 마녀사냥이 극심했던 유럽 땅에서는 이미 마녀재판이 종식된 지 오래였습니다.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가 쓴 희곡 ‘더 크루서블’(the Crucible)은 세일럼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을 모티프로 합니다. 영화 [크루서블] 역시 아서 밀러가 각본을 맡았습니다. 아서 밀러는 매카시즘의 열풍이 한창이었던 1952년에 희곡 ‘더 크루서블’을 썼습니다. 희곡과 각본 사이에 무려 40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있지만, 현실은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청교도적 윤리가 지배하는 세일럼은 소녀들에게는 답답하고 따분한 고장입니다. 긴 머리카락을 모자로 감추고 몸을 꽁꽁 싸맨 드레스를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화권과 시대를 가리지 않고 청소년들은 일탈하기 마련입니다. 소녀들은 한밤에 숲으로 몰려갑니다. 끓어오르는 냄비를 앞에 두고 소원을 빕니다. 그들의 소원은 소박합니다. 그저 좋아하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고 맺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 의식에 미신적 요소가 빠질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여학생들 역시 ‘분신사바’로 귀신(?)을 소환합니다. 미국 여고생들이 위저보드(Ouija board)를 이용해 혼령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일럼의 철부지들도 바베이도스 출신의 흑인 노예 티투바에게 배운 주술을 외웁니다. 흥에 겨운 소녀들은 옷을 벗고 춤을 추기까지 합니다. 유흥에 가무와 노출 행위가 빠지지 않는 것은 인류의 본능인가 봅니다. 지금까지는 귀여운 장난에 불과했습니다. 애비게일(위노나 라이더 粉)이 끔찍한 소원을 빌기 전까지는 말이죠. 게다가 그녀는 닭을 죽여 그 피를 마시기까지 합니다.
하필 애비게일의 삼촌이자 마을 목사인 사무엘 패리스가 그들이 벌인 소란을 목격합니다. 소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집니다. 집단 히스테리 때문일까요? 가장 어린 소녀 두 명이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일이 커졌습니다. 사람들은 소녀들의 장난이 악마가 시킨 일이라고 믿게 됩니다. 사탄 전문가(?)인 존 해일 목사를 마을에 부릅니다. 마차에 가득 실은 책과 함께 해일 목사가 도착합니다. 해일 목사는 마녀와 마법사를 구별하는 내용이 담긴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닙니다. 이 책의 제목은 등장하지 않지만, 중세 유럽 수도사들이 쓴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말레우스 말레피카룸)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녀를 구별하고 법정에 세워 자백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다룬 교본입니다. 이 책은 스콜라 철학의 틀을 빌려와 까다로운 논증을 통해 악(惡)과 마녀의 존재를 입증(?)합니다. 그렇게 도출된 결론은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논리적인 ‘개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당대의 지식인 중 많은 이가 이 책을 지지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헛것은 일견 정교하고 논리적인 외피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애비게일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사실 그녀는 농부 존 프록터(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불륜 관계였습니다. 존 프록터는 그녀와의 관계를 한때의 실수로 치부하며 애비게일을 멀리합니다. 애비게일은 존의 아내 엘리자베스만 없어지면 그들의 관계를 훼방할 사람은 없다고 믿습니다. 소녀들이 모인 그 밤, 애비게일은 존의 아내가 죽기를 바라는 주문을 외웠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그녀는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합니다. 눈치 빠른 그녀는 선제공격을 벌입니다. 마을에 온 해일 목사와 재판관 앞에서 잠시 악마에게 홀렸던 일을 고백함으로써 용서를 받습니다.
이제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애비게일은 마녀 집회를 기획한 이가 흑인 노예 티투바라고 몰아세웁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이 악마에 들렸다고 증언하기도 합니다. 애비게일을 둘러싼 소녀들은 그녀의 말과 행동을 따라 하는가 하면,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합니다. 애비게일에 대한 두려움과 집단 광기가 결합해 벌어진 일입니다. 사람들은 여럿이 모이면 암시를 당하기 쉽습니다. 억압받고 예민한 소녀들이라면 더 암시에 취약하겠지요. 애비게일이 폭주할 때,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용해 서로를 마법사나 마녀로 몰아붙입니다. 지목된 이들은 사회적 약자, 혹은 상반된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입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광경입니다. 아서 밀러는 매카시즘이 불러일으킨 광기를 마녀사냥에 빗대었습니다. 좌우 대립이 심각했던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광기 어린 표정으로 마을을 활보하는 애비게일의 모습은 완장을 찬 홍위병을 연상케 합니다. 마침내 애비게일은 엘리자베스가 마녀라고 고발하기에 이릅니다. 존 프록터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하녀 메리를 포섭해 애비게일이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하게 합니다. 그러나 애비게일은 놀라운 연기력을 발휘합니다. 교회 천장을 바라보며 악령을 보았다며 비명을 지릅니다. 물론 천장에는 천사도 악마도 없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애비게일의 머리는 얼음장처럼 차갑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애비게일의 연기에 속아 넘어갑니다. 겁에 질린 메리는 다시 애비게일의 편으로 돌아섭니다. 존은 마침내 애비게일과 저지른 불륜을 털어놓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애비게일의 원한이 있었음을 주장합니다. 간음은 십계명에서 금지하던 큰 죄입니다. 애비게일의 명예가 더럽혀지면 그녀의 증언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간통을 저지른 일이 없다고 말해 존의 평판을 보호합니다.
악마의 계시를 받았다고 위증한 사람들은 풀려납니다. 그러나 끝까지 양심을 지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존과 엘리자베스 부부도 그들 중 한 명입니다. 애비게일은 구치소에 갇힌 존 프록터를 찾아가 함께 배를 타고 도망가자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존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들이 만날 장소는 배가 아니라 지옥이라는 말과 함께. 역시 애비게일은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다음날, 애비게일은 삼촌인 패리스 목사의 돈을 훔쳐 홀로 배에 오릅니다. 목사와 재판관은 충격에 빠집니다. 교수형을 앞둔 존을 해일 목사가 회유합니다. 사실 해일 목사는 사탄 전문가라기보다 합리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사건의 본질은 마귀 들림이 아니라 사적 원한과 마을 주민들의 반목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존을 설득하라고 부탁합니다. 저들이 원하는 ‘거짓’을 주라고 말합니다. “목숨은 신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요. 어떤 원칙이나 영광도 그걸 뺏는 걸 정당화하지 못해요.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보다 목숨을 헛되이 버리는 자를 더 저주하실 겁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합리적인 조언입니다.
마침내 존은 악마를 섬겼다는 거짓 증언을 하고 아내 곁에 남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존은 차마 다른 이들이 죄를 저질렀다고 위증하지는 못합니다. 빨리 상황을 종결하고 싶은 재판관은 이를 눈감아줍니다. 그러나 존은 자신이 서명한 자백서가 교회 문에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종이를 찢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이름(명예)뿐이니까요. 마침내 존은 교수대에 섭니다. 해일 목사의 말처럼 저들이 원하는 ‘거짓’을 주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변절자라는 비난도 양심의 소리도 목숨을 버릴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몸을 낮추고 조용히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시기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의인들처럼 끝까지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考) 신영복 님도 오랫동안 비전환 장기수로 남았습니다. 흐르는 시간 앞에서 신념이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는 교조주의자라 부릅니다. 역사적 환경이나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체제에 대해 저항하는 의미에서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숭고한 고집일까요.
자, 이제 악녀 애비게일의 입장에서 영화를 다시 살펴볼 시간입니다. 영화 초반에 애비게일은 악녀를 넘어 마녀로 몰릴 위험에 처합니다. 애비게일은 놀라운 수완으로 소녀들의 마음을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합니다. 소녀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애비게일의 말을 따릅니다. 소녀들은 애비게일과 한 몸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서로를 감시하기에 이릅니다. 애비게일은 다른 소녀들과는 다릅니다. 엄격한 청교도 교리가 지배하는 이곳 마을은 소녀들의 숨통을 짓누릅니다. 그러나 애비게일은 규칙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습니다. 유부남 존과 관계를 맺고, 그의 부인을 저주합니다. 그러나 존은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애비게일을 떠납니다. 그러면서도 애비게일에게 여전히 욕망을 느낍니다.
영화 내내 그와 애비게일의 관계는 육체에 국한된 사이로 그려집니다. 그에 비해 엘리자베스와 존 부부의 관계는 존귀하게 묘사되지요. 그러나 17세 소녀 애비게일이 지닌 마음의 결이 그리 단순할 리 있을까요? 존에게는 불장난이겠지만, 애비게일에게는 첫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이용당하고 버림받았다고 느꼈을 때 애비게일의 마음에 남은 상흔이 얼마나 클지에 대해 영화는 다루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애비게일이 저지른 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 모두 한때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애증을 느꼈던 과거를 상기할 필요는 있습니다.
애비게일에게 세상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그의 부모는 애비게일이 보는 앞에서 인디언들에게 살해당합니다. 마을 목사이자 삼촌인 패리스는 조카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똑같이 불륜을 저질렀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비난은 존에 비해 훨씬 가혹합니다. 심지어 존은 법정에서 그녀를 창녀로 몰아갑니다. 대가 없는 성관계를 나누고, 특별한 감정을 느낀 여성을 창녀라고 부르다니요. 미성년자인 애비게일의 유혹에 넘어간 일에 대한 죄의식은 없습니다. 물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애비게일은 성인에 가까운 나이이긴 합니다. 그러나 영화 초반에서 존이 애비게일을 어린애라고 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관계를 가질 때는 성인처럼 대하다가 귀찮게 굴자 어린애 취급합니다. 존은 애비게일에게 미안해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내인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정절을 지키지 못한 사실에 죄책감을 느낄 뿐입니다.
애비게일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여성은 남성을 유혹해 타락시키는 존재였습니다. 마녀사냥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대개 여성입니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여성이 지닌 특성은 저급하기에 악마와의 계약으로 이어지기 쉽다며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마녀사냥의 배후에는 이처럼 여성 혐오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이를 낳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육체적 사랑은 비난받아 마땅한 시절이었습니다.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존재는 늘 여성이었습니다. 존 프록터 역시 애비게일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었다고 여깁니다. 존은 선량하고 강직한 인물이지만, 애비게일에게는 이기적이고 가부장적인 연인일 뿐입니다.
애비게일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면면을 지녔습니다. 부인이 있는 남편을 가로채려는 당돌한 소녀입니다. 다른 소녀들의 정신을 지배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한번 권력을 맛본 애비게일은 도에 넘치는 행동을 시작합니다. 재판관을 협박하는가 하면, 해일 목사의 아내가 자신을 저주했다고 모함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손에 쥔 남성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애비게일 역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할 도구에 불과합니다. ‘선을 넘은’ 애비게일에게 그들은 강력한 경고를 날립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이제 애비게일을 피하고 두려워합니다. 존 프록터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지만 그럴수록 그는 멀어져 갑니다.
애비게일은 신도 악마도 믿지 않습니다. 신앙심과 명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에게 가치가 없습니다. 영화 초반에 애비게일은 그녀를 외면하는 존 프록터에게 다가갑니다. 애비게일은 세일럼 사람들이 육욕에 가득한 가식덩어리라고 말합니다. 애비게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말로 존이 그녀의 이름을 더럽혔다고도 말합니다. 애비게일에게도 이름(명예)은 중요합니다. 그녀의 명예 역시 존과 마찬가지로 ‘진실’에 대한 인정과 관련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존의 말은 애비게일에게는 거짓에 불과합니다. 애비게일에게 사랑은 육체적 열정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무엇입니다. 존을 바라보는 애비게일의 눈빛에는 진심이 가득합니다. 존은 예수 앞에 선 베드로처럼 자신의 감정을 부정함으로써 그녀에게 큰 죄를 짓습니다. 애비게일이 마을 주민들에게 그랬듯, 존 프록터 역시 애비게일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존이 애비게일에게 가하는 폭력은 육체적 사랑에 대한 부정, 기독교적 윤리와 가부장제에 대한 강요입니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는 영화가 온전히 다루지 못한 진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애비게일이 매카시즘을 표상한다면 존 프록터는 일종의 전체주의자를 연상케 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신실하고 정직하지만, 존의 말처럼 ‘냉정한 여인’입니다. 남편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애비게일을 미워하지요. 심지어 존이 교수형을 받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재판관의 요청에도 존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대답합니다. 오죽하면 재판관조차 “당신은 목석이냐”는 말을 할까요? 엘리자베스는 교수형을 앞둔 남편에게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존 역시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고백합니다. 두 사람에게 애비게일은 평온한 일상을 빼앗은 마녀일 뿐입니다. 애비게일이 원한을 품은 이유가 존이 그녀를 가벼이 여기며 모욕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애비게일은 엘리자베스와는 다른 방법으로 존을 사랑합니다. 애비게일은 피안을 믿지 않습니다. 존에게 도망치자는 제안을 한 이유도 이생 너머의 세계를 믿지 않기 때문이죠. 존이 제안을 거부하자 애비게일은 삼촌의 돈을 훔쳐 홀로 배에 오릅니다. 끝까지 그녀는 영악하고 현실적인 인물로 남습니다.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거짓말은 자신의 목숨을 지킬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마녀 집회를 주최했다고 의심받으면 그녀 역시 목숨을 잃게 되니까요.
영화는 애비게일의 섬세한 감정선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덕분에 애비게일은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절대 악’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선인도 없습니다. 세상은 필요할 때마다 사회주의자, 유태인, 특정 민족을 ‘절대 악’으로 규정했습니다. 영화 [크루서블]은 마녀사냥이 현재에도 자행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특정한 목표를 위해 악을 규정하기란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에도 존재할 초역사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애비게일 또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절대 악’으로 묘사합니다. 애비게일은 계속해서 거짓 선전을 생산하는 인물로 매카시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매카시즘 역시 미국 사회를 뒤흔든 사상일 뿐, ‘절대 악’과는 거리가 멉니다. 세상에는 악이 아니라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지요. 애비게일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애비게일 역시 시대가 만든 희생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초에 마녀재판이 열리지 않았다면 애비게일 역시 꼬리를 무는 거짓말을 만들어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지금껏 소개한 영화 속 악녀들과는 달리 애비게일은 시련(크루서블)을 통해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세일렘의 다른 여성과는 달리 관습과 규범을 따르지 않습니다. 종교와 믿음 등 당대의 가치를 신봉하지도 않습니다. 그녀가 타고난 비범함을 인정한다 해도 애비게일의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낼 수 없습니다. 그녀가 지은 죄는 강한 생존 욕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적 복수에 그녀의 권한을 남용하지 않았다면 애비게일은 그저 살아남으려 애쓴 피해자로 기억될지도 모릅니다.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마녀사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애비게일을 따르는 소녀들처럼 우리는 침묵을 통해 가해자가 됩니다. 어리고 힘없는 소녀에 불과했던 애비게일을 마녀로 만든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일지도 모릅니다. 애비게일 역을 맡은 위노나 라이더의 광기 어린 연기는 놀랍습니다. 윤리와 도덕에 구애받지 않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존을 바라보는 표정은 애정에 충만합니다. 영화에 출연하고 몇 년 뒤, 절도 사건에 연루되면서 위노나 라이더는 ‘마녀 사냥’의 희생양이 됩니다. 다행히 그녀는 오랜 자숙 끝에 재기해서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