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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Nov 29. 2024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

나쁜 그녀들 세상을 매혹하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에게 차마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요? 게다가 성폭행을 당하고 시신이 불에 탄 채 발견된 딸의 부모에게 말입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통곡의 벽 앞에서 우리는 침묵 속에 곡진한 위로를 전할 뿐입니다.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범인은커녕 용의자도 특정할 수 없습니다. 영화 ‘쓰리 빌보드(2018)’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범죄 앞에 선 피해자 가족의 분노와 투쟁, 그 끝에서 마주한 세상과의 화해를 그립니다. 영화는 미국 남부 가상의 작은 마을, 에빙을 배경으로 합니다. 


집으로 차를 모는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의 눈빛은 공허합니다. 사랑하는 딸 안젤라를 범죄로 떠나보낸 지 7개월이 지났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황량하고 외진 도로에 서 있는 빌보드(옥외 광고판) 세 개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끕니다. 며칠 뒤, 마을은 발칵 뒤집힙니다. 광고판에 차례차례 적힌 도발적인 문구 때문입니다. 타는 듯 붉은빛의 광고판에는 내 딸이 강간당하며 죽어갔는데 아직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광고는 하필 경찰서장 윌로비(우디 해럴슨)의 이름을 콕 찍어 저격합니다. 


경찰이 수사를 소홀히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범인의 DNA는 범죄자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인물 중 누구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목격자도 이렇다 할 용의자도 없는 범죄를 해결할 길은 요원해 보입니다. 밀드레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밀드레드가 원하는 것은 광고판이 불러일으킬 화제성입니다. 사람들이 범죄 사실을 환기할수록 범인이 잡힐 가능성은 더 커질 테니까요. 밀드레드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집니다. 외진 도로에 세워진 광고판을 취재하러 방송국에서 찾아옵니다.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은 언론의 관심을 잡아끄는 데 성공합니다. 


윌로비로서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광고판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경찰서장 윌로비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성실하고 현명한 경찰입니다. 젊은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딸을 거느린 가장이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췌장암으로 죽어가는 윌로비가 이 사건으로 받을 스트레스를 걱정합니다. 그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밀드레드에게 적의를 느낍니다. 원래도 까칠했던 그녀의 성품은 딸의 죽음으로 인해 더 공격적으로 변한 상태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녀가 느낄 분노에 대한 공감보다는 윌로비에게 느끼는 연민이 더 큽니다. 안젤라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안위가 우선이니까요. 


무능하고 편협한 경찰 딕슨(샘 록웰)은 사고뭉치입니다. 흑인 피의자를 구타한 전력이 있고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입에 달고 삽니다. 딕슨은 같은 경찰들 사이에서도 경원시당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딕슨도 서장 윌로비만큼은 존경합니다. 윌로비는 딕슨에게 돌아가신 아버지와도 같습니다.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시골 마을 에빙은 다수와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있지 않습니다. 경찰서에는 딕슨 외에도 인종차별주의자가 가득합니다. 


밀드레드를 돕는 사람들이 마을에서 소외된 이들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친구 드니스와 광고판을 세운 노동자 제롬은 흑인입니다. 왜소인(矮小人) 제임스(피터 댄클리지) 역시 그녀의 편에 섭니다. 마침 췌장암으로 고통받던 윌로비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윌로비의 죽음은 밀드레드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윌로비는 안젤라의 살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밀드레드와 그녀가 세운 광고판을 향합니다. 딕슨은 광고업자 레드 웰비를 두들겨 패고 경찰직에서 해고됩니다. 


한편 윌러비가 남긴 편지가 밀드레드에게 도착합니다. 밀드레드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광고비를 내지 못한 상태입니다. 밀드레드는 다음 달 광고비를 기부한 독지가가 윌러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윌러비는 범인이 꼭 잡히기를 빌며 그녀를 위로합니다. 윌러비는 딕슨에게도 편지를 남깁니다. 한밤중에 경찰서로 찾아간 딕슨은 그가 남긴 유서를 읽습니다. 훌륭한 경찰이 되려면 증오를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찾으라는 유언에 딕슨은 깊이 감화합니다. 그 순간 갑자기 경찰서가 화염에 휩싸입니다. 딕슨은 안젤라의 사건 파일을 가슴에 안고 경찰서를 빠져나갑니다.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진 것은 밀드레드의 짓이었습니다. 광고판에 누군가 불을 질렀기 때문입니다. 광고판은 그녀에게 딸의 무덤과도 같았습니다. 날마다 광고판 밑에 심은 꽃에 물을 주고 가꿔왔습니다. 광고판에 붙은 불이 밀드레게에게는 딸의 시신을 태우는 화마로 느껴집니다. 광고판을 불태운 것이 딕슨의 짓이라 오해한 밀드레드가 경찰서를 공격한 것입니다. 광고판을 불태운 진범이 누군지 밝혀졌을 때, 관객은 한숨을 내쉽니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딕슨은 술집에 갔다가 우연히 뒷자리에 앉은 남자의 발언을 듣게 됩니다. 그가 늘어놓는 무용담은 안젤라의 사건과 너무 흡사합니다. 딕슨은 그가 범인이라 확신하고 일부러 시비를 걸어 그의 DNA를 확보합니다. 그러나 그 남자의 DNA는 범인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안젤라가 죽은 시기 그는 중동에 파견 나간 군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가 여성을 강간하고 불태워 살해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그저 허풍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딕슨은 어느 여성이 타국에서 안젤라와 같은 일을 겪었다고 확신합니다. 밀드레드와 딕슨은 그를 처벌하기 위한 여정을 떠납니다. 영화는 그들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지 보여주지 않으며 일종의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영화는 ‘불편한 진실’이 공동체에 일으키는 파급력에 관해 다룹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안젤라 사건에 대해 잊고 싶습니다. 계속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느끼며 그들을 입막음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이미 목격한 일이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그랬고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가 그랬습니다. 앞의 두 사건은 행정의 공백과 제도의 미비가 큰 원인이었던 인재(人災)였습니다. 가해자를 비교적 명확하게 적시할 수 있는 이들 사고와 안젤라의 사건을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그 구성원의 안전을 책임지고, 피해자의 가족을 위무할 책임이 있습니다. 


LA에서 갱단이 범죄를 저지르면 범죄에 동참하지 않은 나머지 갱들도 같은 혐의로 처벌받습니다. 집에 찾아와서 광고판을 내리기를 요구하는 신부에게 밀드레드가 한 말입니다. 그들을 연좌제로 묶는 것은 범죄를 저지른 집단에 책임을 묻는 일과 같습니다. 넓은 시각으로 보면 어떤 범죄도 단순한 개인적 사건이 아닙니다. 젊은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되었습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혐오와 무시에서 비롯한 범죄이며, 여기에는 분명 구조적 요인이 작용합니다. 가해자가 잡히지 않는 한, 사건은 끝나지 않습니다. 시신에서는 계속 연기가 피어오르고, 남은 사람들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고입니다. 공동체가 피해자의 가족과 연대하지 않고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가해자의 편에 서 있을지도 모릅니다. 


때로 불의를 겪거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이 과격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붙들려는 절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분신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들의 죽음이 그랬습니다. 여성 참정권을 찾으려 달리는 경주마의 말발굽에 뛰어든 여성 운동가의 죽음이 그랬습니다. 퀴어 운동가들의 퍼레이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혐오가 묻어있습니다. 도로에 세워진 붉은 광고판은 우리의 마음에 드리운 그림자를 건드립니다. 우리가 느끼는 작은 불편함을 그들의 느낀 질곡의 세월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과연 그들의 ‘방법’이 잘못된 것일까요?


영화는 또한 미국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폭력, 혐오, 위선에 대해 고발합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밀드레드 역시 자신을 좋아하는 제임스가 왜소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죽은 윌러비의 후임으로 부임한 서장을 경찰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가 흑인이기 때문입니다. 경찰서에 난 화재로 얼굴에 화상을 입은 딕슨은 이제 본인이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그제야 딕슨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대해 깊이 반성합니다. 


심각하고 음울한 주제를 풀어나가는 영화의 어조는 무겁지만은 않습니다. 유머와 위트, 담담한 시선을 잃지 않습니다. 윌러비가 보낸 유서가 쏘아 올린 의미의 연쇄는 강한 파급력을 갖습니다. 증오와 무력함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딕슨과 밀드레드는 비슷한 심리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증오를 버리고 사랑을 택하라고 서장이 남긴 말은 딕슨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광고 비용을 대신 내준 서장의 호의에 밀드레드의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야기한다’는 빤한 이야기가 진정성을 찾는 순간입니다. 


영화 초반에 광고사를 찾은 밀드레드는 몸이 뒤집힌 채로 버둥거리는 벌레를 들어 올려 제 자리를 찾아줍니다. 그녀의 작은 선의가 또 다른 선의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화상을 입은 딕슨은 자신이 폭행한 레드 웰비와 같은 병실을 쓰게 됩니다. 딕슨을 알아보지 못한 레드는 그를 위로하며 오렌지주스를 권합니다. 딕슨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레드에게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레드는 그에게 분노를 폭발하면서도 그를 위해 주스를 마련합니다. 붕대를 감은 딕슨의 좁은 시야에 그가 먹기 편하도록 빨대가 꽂힌 주스가 들어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인물들의 캐릭터는 입체적이며 있을 법합니다. 밀드레드와 안젤라의 관계는 여느 십 대 소녀와 어머니처럼 애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필 딸이 살해되는 날, 모진 말을 내뱉은 밀드레드의 마음은 후회로 가득합니다. 안젤라가 헤어진 남편과 지내려 했었다는 말을 듣고 밀드레드의 마음은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나 안젤라 역시 사이가 나빴던 어머니를 사랑했음이 분명합니다. 싸우고 치고받고 험한 말을 주고받아도 가족은 가족이니까요. 영화는 경찰 딕슨의 성장기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딕슨의 태도에 관객은 깊이 공감합니다. 


많은 비극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남편 윌로비를 잃은 앤 역시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꿋꿋이 살아갈 것입니다. 밀드레드에게도 돌봐야 할 아들 로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딸을 죽인 범인을 잡겠다는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신산한 삶 속에서 때로 동화 같은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광고판을 손보는 밀드레드 곁으로 아름다운 사슴이 다가옵니다. 순간 그녀는 딸이 환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윌러비 서장은 아내, 두 딸과 함께 호숫가에서 피크닉을 하며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선물합니다. 반짝거리는 윤슬, 아이들의 웃음소리, 풀밭에서 나눈 사랑은 앤이 삶을 버텨나갈 희망이 되어줄 것이 분명합니다. 


앙숙이었던 밀드레드와 딕슨은 범죄자를 찾아 함께 여정을 떠납니다. 밀드레드는 불쑥 그녀가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왜 뻔한 이야기를 하느냐는 딕슨의 볼멘소리에 밀드레드의 얼굴에 웃음이 번집니다. 그들 사이에 진정한 화해와 연대가 성립하는 순간입니다. 그들이 저지를지도 모를 린치는 먼 타국에서 딸을 잃은 어머니의 복수를 대리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죠. 


‘아이 토냐’, ‘더 포스트’, ‘레이디 버드’ 등 유난히 훌륭한 아카데미 후보작들이 많았던 2018년, ‘쓰리 빌보드’는 가장 돋보였던 영화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복잡한 심경을 연기한 프랜시스 맥도맨드는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습니다. 밀드레드는 살해당한 자식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는 악녀입니다. 그러나 복수심으로 가득했던 밀드레드의 마음에는 어느덧 그녀를 도우려는 사람들의 선의가 깃듭니다. 위협과 공포 앞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는 밀드레드는 우리에게 불의와 맞서는 사람들과 연대할 용기를 가르쳐줍니다.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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