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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Nov 29. 2024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

나쁜 그녀들 세상을 매혹하다

학교에서 일어난 대량살인(mass murder) 사건이 언론을 오르내리곤 합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릴 수만은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세상 어디서나 똑같습니다. 여기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여느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아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두려워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달려갑니다. 어머니의 걱정과 달리 아들은 다치지도 죽지도 않았습니다. 이럴 수가……. 내 아들이 피해자가 아니라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 가해자라니요. 모든 어머니가 꿀 수 있는 최악의 악몽이 아닐까요.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의 첫머리에서 카메라는 붉은 토마토즙을 뒤집어쓴 사람들의 머리를 부감합니다. 토마토 축제의 현장입니다. 사람들은 에바(틸다 스윈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운반합니다. 쏟아지는 햇살과 빨간빛이 축제의 즐거움을 고취합니다. 살인마라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에바를 과거에서 현실로 끄집어냅니다. 거리에 고인 토마토즙이 피 웅덩이처럼 보입니다. 화면이 전환되고 에바는 사람들이 집에 뿌린 붉은 페인트와 마주합니다. 


에바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여행가입니다. 오랜만에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남편(존 C 라일리)과 뜨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안전한 기간이야?”, “아니.” 화면은 세포들의 분열을 보여줍니다. 새 생명의 탄생이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에바의 몸속에서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출항을 앞둔 배처럼 늘 떠날 준비가 되어있던 에바를 비끄러매는 것은 임신과 출산, 양육입니다. 임신으로 변한 신체를 거울로 비춰보는 에바의 눈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임산부들이 모여있는 공간에서도 에바는 왠지 불편한 듯합니다. 부른 배와 임신 선을 드러낸 채 수다를 떠는 그녀들의 세계에 에바는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에바에게 임신이란 그녀의 몸에서 자신을 소외시키는 경험입니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아는 그(임산부) 몸의 일부이자 그를 착취하는 기생적 존재다. 그는 그것을 소유하고 또 그것에 의해 소유된다.” 에바가 느끼는 임신에 대한 감각입니다. 마침내 에바는 아들을 출산합니다. 아이는 10개월간 에바의 자궁에 속해있던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그 창조행위에 에바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거의 없었습니다.


짧은 쾌락의 부산물로 주어지는 온갖 고통은 창조 설화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원죄에 대한 묘사 같습니다. 입덧은 아이를 이물질로 받아들이는 신체의 거부반응입니다. 출산의 고통은 온몸의 뼈를 떼었다가 다시 잇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마주한 아이는 완벽한 ‘타인’입니다. 여성은 출산과 동시에 ‘낯선 이’(아이)를 사랑하라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많은 여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이 명령을 순순히 따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모성’이 결핍된 여성이라 여기며 죄의식을 느낍니다. 모성 신화는 이토록 많은 어머니를 죄인이라 여기게 만듭니다. 


케빈은 태어날 때부터 에바를 골탕 먹이기로 작정한 아이 같습니다. 유달리 예민한 케빈은 임신 순간부터 자신을 거부했던 에바의 마음을 읽는 듯합니다. 에바가 느낀 거부감이 무의식적으로 탯줄을 통해 태아에게 전달된 것일까요?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케빈을 유모차에 태워 걷던 에바는 공사 현장 앞에 멈춰 섭니다. 공사장에서 울리는 소음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찾는 에바의 얼굴은 육아에 지친 그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부모가 아이를 위해 그동안의 삶의 방식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에바는 자의식과 성취욕이 강한 여성입니다. 케빈을 좋은 환경에서 양육하기 위해 뉴욕을 떠나는 에바의 마음은 찢어질 듯합니다. 케빈의 말썽은 끊이지 않습니다. 에바는 자유롭게 여행하던 시기를 그리워하며 세계 지도로 자신의 방을 장식합니다. 케빈은 그런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도 위에 물감을 뿌립니다. 에바는 케빈에게서 물감이 든 총을 빼앗아 발로 짓밟습니다. 물감의 붉은 자국이 카펫 위에 낭자합니다. 


이제 에바는 케빈의 정신 건강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남편 프랭클린은 “남자아이는 원래 그렇게 크는 거야.”라는 말로 에바를 신경 쇠약으로 몰아세웁니다. 의사 역시 케빈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케빈은 에바 앞에서만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듯합니다. 케빈은 늦게까지 배변 학습이 되지 않습니다. 기저귀를 갈자마자 에바 앞에서 일부러인 듯 또 배변하는 케빈은 에바의 이성을 잃게 합니다. 에바는 엉겁결에 케빈을 집어던지고 케빈의 팔이 부러집니다. 


케빈을 의사에게 데려간 에바는 아동 학대를 의심받을까 염려합니다. 혼자 진료실에 들어선 케빈을 의사가 데리고 나옵니다. 의사는 “참 씩씩한 아드님을 두셨네요.”라는 의사의 말은 에바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케빈은 프랭클린에게 자신이 기저귀 대에서 떨어졌다는 말로 에바의 죄를 감싸줍니다. 바로 그날부터 케빈은 화장실에서 배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은 에바를 괴롭히기 위해 늦게까지 기저귀를 사용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런 케빈이 유일하게 에바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이 등장합니다. 아파서 누워있는 케빈을 에바가 간호합니다. 케빈은 에바에게 기대어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에바는 로빈 후드를 읽어주며 케빈을 안아줍니다. 모자간의 가장 애틋한 시간에 등장한 책이 로빈 후드라는 사실은 이후 일어질 사건을 떠올리면 아이러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몸이 회복되자 케빈은 다시 마음을 알 수 없는 차가운 아이로 되돌아갑니다. 눈이 날카로운 케빈이 어느 날 에바에게 말합니다. “엄마, 뚱뚱해졌어.” 그렇습니다. 에바는 둘째를 임신했습니다. 


이번만큼은 에바의 계획대로 임신한 것 같습니다. 친구를 가지고 싶지 않냐는 에바의 질문에 케빈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익숙해져야 한다는 에바가 말하자 케빈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익숙해지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달라. 엄마는 내게 익숙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잖아.”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켈빈의 말에 에바는 당황합니다. 이미 한 번 임신을 경험해서였을까요? 이번 임신은 케빈의 경우와는 달리 순조롭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실리아는 케빈과 완전히 다른 아이입니다. 사랑스럽고 온순합니다. 케빈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것과는 달리 에바는 자연스럽게 실리아에게 모성을 느낍니다. 


사춘기에 들어선 케빈은 더욱 다루기 힘든 아이가 됩니다. 그러나 에바가 케빈에게 느끼는 섬뜩함을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케빈은 실리아에게 짓궂게 대하지만, 실리아는 케빈을 제일 좋은 친구라 부릅니다. 프랭클린은 활쏘기를 좋아하는 케빈에게 활과 화살을 선물합니다. 이 선물이 앞으로 일어날 대재난의 단초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합니다. 에바 역시 아들과의 관계에서 노력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케빈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냉소와 독설뿐입니다. 


실리아가 기르던 기니피그가 배수구에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에바는 케빈을 의심합니다. 기니피그의 사체를 처리하려고 꺼낸 염산 때문에 실리아는 한쪽 눈을 실명합니다. 이번에도 에바는 케빈이 에바를 해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케빈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에바의 의심일 뿐입니다. 결국 에바와 프랭클린의 부부 관계는 케빈 때문에 금이 갑니다. 두 사람은 각자 딸과 아들을 데리고 이혼하기로 협의합니다. 그리고 대재앙의 날이 닥칩니다. 케빈은 학교 문을 걸어 잠그고 학생들에게 활을 쏘아 살해합니다. 그러기 전에 아버지와 여동생을 먼저 죽입니다. 에바는 한꺼번에 가족과 명예, 사회관계, 재산 등 모든 것을 잃습니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 편집하며 에바와 케빈의 관계를 조망합니다. 많은 여성이 에바처럼 모성 신화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완벽한 자식이 없듯이, 완벽한 어머니 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 어머니에게 배우며 성장하듯, 어머니 역시 자식을 기르며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납니다. 케빈이란 존재는 불완전한 모성을 단죄하는 듯한 캐릭터입니다. 동시에 끝없는 애정 결핍을 호소하는 자식을 상징합니다. 


대량 살인마 자식을 둔 어머니는 악마와도 같습니다. 영화를 지배하는 색감은 붉은빛입니다. 사람들은 에바의 집에 붉은 페인트와 물감을 뿌립니다. 에바는 끝없이 붉은빛을 지워댑니다. 하지만 그녀의 손톱에 파고든 물감처럼 핏빛 얼룩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케빈을 갖기 전, 토마토 축제에서 쓰였던 붉은 색감이 건강한 생명력을 상징했다면, 이제 붉은빛은 그녀의 마음에서 떠날 수 없는 원죄와도 같습니다. 아무리 지워도 붉은빛은 그녀의 머리칼과 손톱 밑, 얼굴에 남아있습니다. 


그녀가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어떤 여성은 길에서 마주친 그녀의 얼굴을 때립니다. 케빈 때문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분명합니다. 슈퍼마켓에서 케빈이 죽인 학생의 어머니와 마주친 에바는 카트만을 남긴 채 몸을 숨깁니다. 하필 몸을 숨긴 그녀의 등 뒤로 붉은 토마토 캔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계산대에 선 에바는 달걀 바구니에 든 달걀이 모두 깨져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에바는 계산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겁지겁 달걀을 쇼핑백에 밀어 넣습니다. 에바가 요리한 오믈렛에는 달걀 껍데기가 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입에 넣은 오믈렛에서 끝없이 달걀 껍데기를 꺼냅니다. 면회에서 만난 케빈이 물어뜯은 손톱을 입에서 꺼내는 장면이 겹쳐 보입니다.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한 말처럼 단단한 그 무엇을 두 사람은 입에서 게워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녀를 처벌하는 존재가 같은 어머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그들은 에바의 자식으로부터 자식을 잃은 희생자입니다. 그들의 눈에 에바는 자식을 대량 살인마로 길러낸 악랄한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케빈에게서 자식을 잃지 않은 어머니도 그녀를 악마 취급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완벽한 모성을 구현하지 못한 에바를 단죄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그들에 비해 에바에게 호의적입니다. 에바의 변호사들은 남자이며, 거리에서 폭행당하는 에바를 돕는 이도 남자입니다. 


길에서 만난 케빈의 동창은 휠체어에 앉아 그녀에게 밝게 인사합니다. 그는 케빈에게 화살을 맞은 희생자입니다. 그는 의사에게서 걸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그녀에게 잘 지내라고 말을 건넵니다. 이들 남성은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에 에바에게 동정적일 수 있습니다. 모성이라는 신화로 여성을 감시하고 도덕을 강제하는 존재는 같은 여성입니다. 그들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연대하는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의 모성을 감시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 케빈과 같은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케빈이 타고난 사이코패스인가, 어머니와의 애착 부족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냐는 논쟁은 이 영화에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극 중 세면대의 물에 얼굴을 넣는 에바의 얼굴은 케빈의 얼굴로 변화합니다. 케빈과 데이트하던 에바가 뚱뚱한 사람들을 욕하자 케빈은 악담한다며 그녀를 놀립니다. 너 역시 만만치 않다고 에바가 받아치자 케빈은 “누굴 닮았겠어?”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유전자 일부를 공유한 운명공동체이자 소통의 부재로 괴로워하는 영혼의 한 쌍입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말대로 어머니 노릇은 “우리에게 가까운,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낯섦과의 가장 강렬한 형태의 접촉”입니다. 세상과의 절연 속에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모성의 피폐와 손상을 초래합니다. 세상과의 절연이란 ‘독박 육아’나 경력 단절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식이란 타인과의 접촉, 그 낯섦을 이해해주지 않고 모성 이데올로기만을 강요하는 세계와의 조우를 뜻합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세계관의 확장을 뜻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좁은 세상으로 후퇴하는 퇴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살육극이라는 형식을 빌려, 그 퇴로 끝에 선 어머니와 아들에게 벌어진 비극에 대한 비유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성인 교도소로의 이감을 앞둔 케빈에게 에바는 묻습니다. 대체 왜 그런 일을 벌였냐고. 케빈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불안하게 흔들립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았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모르겠어.” 처음으로 케빈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털어놓는 순간이자 처음으로 아들과 어머니가 마음을 터놓는 순간입니다. 에바는 케빈을 끌어안고 케빈 역시 그녀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이제 에바는 케빈을 진심으로 받아들입니다. 비록 용서받지 못할 범죄자이지만, 케빈은 에바의 아들입니다. 그녀는 ‘도덕적 의무’가 아닌 진정한 애정을 느끼며 아들을 품습니다. 케빈은 평생 그녀가 품어야 할 사랑이자 극복할 수 없는 원죄입니다. 


아름답고도 섬뜩한 미장센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극도로 함축된 대사만으로 영화를 풀어갑니다. 영화는 2011년 제64회 칸 영화제 경쟁 부분에 초청받았습니다. 틸다 스윈튼은 눈빛만으로도 어머니의 복잡한 심경을 연기합니다. 에즈라 밀러의 연기력 역시 그녀에 뒤지지 않습니다. 영화에 쓰인 경쾌하고도 애수에 찬 컨트리 음악은 영화의 내용과 불협화음을 빚어내며 묘한 역설을 자아냅니다. 틸다 스윈턴이 분한 에바는 ‘악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를 대변합니다. 이 영화는 한 어머니와 아들의 잔혹하고도 슬픈, 절망으로 가득한 성장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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