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남의 편

홀로서기

by 일기일회

"작은 누나가 자궁근종 제거하는 수술을 한대

잘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네.."

무심히 던지는 남편의 말이 가슴속 잠재되었던 화를 솟구치게 한다

남편과 피를 나눈 누나가 수술을 한다는데 함께 걱정해주지 못할망정 난 왜 불현듯 화가 솟구친 걸까


'나도 얼마 전에 유방 시술받았어

그것도 두 번이나 보호자 없이 혼자서 병원 가고

혼자서 퇴원했어'

'의사가 그러는데 내 자궁 안에도 근종이 있대

그래서 하혈하는 거래 또 빈혈 수치도 낮아진 거고

하루라도 빨리 시술하래'

'너랑 한 이불 덮고 살고 있는 마누라 몸 상태가

그렇다는 거야.. 알기나 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입안에서 맴도는 혼잣말을 하고 있다

맘 카페에서 남편을 남의 편이라고 표현된 글을 읽고선 혼자서 공감백배를 누르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 남의 편인 남편도 마누라 몸상태는 알지 못하고 자기편 핏줄밖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남편과 내가 서로의 남의 편이 되기까지 지난했던 기억들을 꺼내놓지 않을 수가 없다



남들처럼 죽을 만큼 사랑하지도 않았고

오랜 연예기간을 가진 것도 아니고

공통의 관심사나 취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관계로 한 다리 건너 건너 아는 사람 정도의 친분을 맺고 있었을 뿐이다

다만 그때 난 사랑했던 사람과 막 연예가 끝이 났고

슬펐고 아팠다

어느 날 밤 나를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남편의 호의에

그럼 고맙죠란 말로 동의를 했다

외등 하나만 밝히고 있던 골목길에서 느닷없이 나를 줄곧 좋아했었다며 고백을 해온 남편과 키스를 했던 날이었다

지금 시절이라면 한 번의 키스가 아무 의미도 없었을 텐데 그땐 왜 결혼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부부의 인연은 따로 있다는 어른들 말씀이 옳았던 걸까

아님 헤어짐 뒤에 따라온 자포자기하는 심정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넉넉하지 않은 남편의 경제력에 반대를 하셨지만

나 역시 그닥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기에 결혼을 밀어붙이고 말았다



둘 다 수중에 모아두었던 돈이 없어서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끝자락 다세대 주택이 밀집된 곳으로 천만 원짜리 전세를 얻었다

천만 원 전세가 말해주듯 집안 구조는 형편이 없었다

겨울이면 벽과 수도가 얼어서 수시로 도치를 이용해 녹여야 했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큼 비좁은 화장실은 하나 있었으나 샤워할 욕실이 없어서 싱크대 아래서 쭈그려 샤워를 했다

세탁기가 없어서 급한 대로 월급을 모아 짤순이를 마련했다

짤순이는 탈수 기능만 있어서 세탁은 손빨래를 했다

사는 형편은 좋지 않았지만 지금 남의 편인 남편과는 그때가 사랑이라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을 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몇 번의 이사를 거듭해 첫째를 낳을 무렵엔 서울로 입성해 아파트 전세로 옮길 수 있었다

내 집 마련이 최우선 목표였던 우리는 모든 것을 아끼고 아껴 서울 변두리 소형 아파트를 장만했다


내 집 장만이란 즐거움을 다 만끽하기도 전에 덜컥 둘째가 생겼다

난 아이 하나만 낳을 생각이었지만 남의 편인 남편은 아이 하나는 외롭다며 더 낳기를 원했다


둘째를 낳고 6개월쯤 아이의 발달이 뭔가 이상하단 예감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은 늘 한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는다

"이 아이는 평생 장애를 갖고 살 것이고

인지도 발달도 되지 않을 겁니다

평생 누워 지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의료진은 더는 나빠지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신의 직업적 소임은 여기까지고 이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의사 선생님은 무덤덤한 말투로 잔인한 사망선고를 내리셨다

그날 우리에게 내려진 사망선고는 남의 편이 될 것이란 전초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약도 없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병원생활이 이어지고

언제 깊은 수면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시간들은 흘러가고

둘째를 낳지 않겠다던 나에게 낳으라고 설득한 남편의 원망이 쌓여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질흙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

남편은 언제나 무슨 일들이 있었냐는 듯 개의치 않고

코를 골며 잠든 밤

10층 베란다 너머 도로가에 환한 헤드라이트 불빛을 밝히고 목적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들이 보이던 밤

둘째는 어디가 아픈지 말도 못 하고 칭얼대며 며칠을 울던 밤

우는 둘째를 들쳐업고 베란다 창문을 열어 난간에 서 있던 밤

조금만 더 몸을 기울이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던 밤

잠들었다고 생각했던 다섯 살배기 첫째가 어디선가 나타나

고사리 같은 다섯 손가락으로 내 치맛자락을 부여잡으며

"엄마 나 목말라...물 줘"라고 말하던 밤

난 끄끝내 목놓아 울어버렸다

사는 게 싫어서 울고

사는 게 고되서 울고

이제 나를 좀 놓아주라고 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해서 울었다



때론 사는 게 이유 없이 무미건조하게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받아들이며

의무감만 남아서 살아내야 할 때가 있다

나에겐 첫째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의무감과

아픈 둘째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감이 생겼을 때였던 것 같다

그런 의무감의 무게가 더해져 갈수록 남의 편이 된 남편과의 관계도 점점 멀어져 갔다



난 하루에도 수십 가지 크고 작은 선택지를 받아 든다

가족들이 먹어야 할 음식

날씨 변화에 따라 입혀야 할 옷들

언제까지 납부하라는 고지서들

집안의 대소사

설거지를 하면서 버려야 할 음식물쓰레기를 생각하고

세탁기를 돌리면서 마른 옷가지를 걷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내일은 회사에서 중요한 브리핑을 해야 하는데

낮까지 괜찮았던 아이가 밤에 열이 난다

응급실을 데리고 갔더니 입원을 하란다

남의 편인 남편은 출근을 해야 한다는 말 한마디면 되지만

난 그때부터 온갖 벌어질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 마음을 졸인다


어느 날이었던가

남의 편인 남편은 내게 시댁일에 소홀하다고 핀잔을 하던 날

난 그동안 참고 해오던 일들에 사표를 냈다

더 이상은 나란 존재를 버리고 살지 않겠노라고 선언을 했다

나도 숨이란 걸 쉬며 살고 싶다고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그날 우린 차마 소리로 내뱉진 못했지만

서로가 완전한 남의 편이 되자고 암묵적 동의를 했을 것이다



상대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쿨한 소신적 발언 같지만

몹시 외롭기도 하고 몹시 서글프기도 하다

반면 외롭기도 서글프기도 한 것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난 후자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또는 억울한 일에 휘말렸을 때 미치도록 분개하는 날이 있다

그럴 땐 오롯이 나만을 편들어주는 내편인 남편에게 연락할 수 없다는 건 서글프다

한 공간에 살면서 단 오분의 대화도 할 수 없다는 건 분명 외로운 일이다

"우리 남편은 나더러 삼백 이상 벌거 아니면 그냥 집에서 애만 키우래"

"나도 일이백 벌겠다고 종종 거리며 일하기도 싫고!"라고 말하는 옆집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

난 그 일이백이라도 벌어야 남편에게 기대지 않고

나 스스로 밥도 먹고 아이들도 키우며 살아갈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난 일이백 벌겠다고 나가지 말고 애만 키우라는 남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이 있었다면 옆집 엄마처럼 말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남의 편인 남편이 있었기에 아픈 아이를 키우면서 이십 년의 직장생활을 해내며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다



아이를 낳았으니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과

경제적인 부분을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만이 남은

나와 남의 편인 남편은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이제 남의 편인 남편에게 지난날의 원망을 쏟아놓지 않는다

내가 상처 받았던 날들만큼 그도 받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가 더 크다고 느껴져 상대의 상처를 애써 외면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서로에게 주었던 상처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인할 순 없다

둘 중 누군가가 끝을 내자고 말하지 않는 한 우리는 버티는 삶을 사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다

버티는 삶을 포기한다면 남의 편으로 살아야 했던 남편의 고단한 삶도 고생 많았다고 미안했다고 위로해 주고 싶다

허나 버티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린 백발의 노인으로 함께 늙어갈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왜 그렇게 살았을까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있다면

남의 편인 남편의 운명이 다하는 날까지 내가 동반자가 되어 동행하여 주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리어카에 쌓인 삶의 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