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당신에게 반사!

타산지석

by 일기일회

지금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유난히 눈에 띄는 화장을 하신 것 같다. 한때 유행하던 스모키 화장법과 비슷했고 성악가 키메라의 독특한 화장법과 비슷했던 기억이 난다. 좀 더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눈두덩이에 진한 파랑이나 연두색을 그라이데이션 하기도 했고 눈동자 아래에 검고 진한 선으로 눈매를 강조하기도 하셨다. 손톱은 매일 빨주노초파남보의 화려한 색으로 매니큐어를 바르셨다(그 손톱으로 집안일을 하셨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머리 모양은 빈티지 스타일로 자유분방하게 자르시거나 사각진 넓은 이마를 훤히 드러내시고 올빽으로 머리를 묶기도 하셨다. 굵고 무게감 있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목걸이를 하셨다. 젊음의 매력을 외모로 한껏 멋들어지게 발산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외국 여성들의 자유분방함과 인텔리전트 한 모습을 갈망하셨는도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가 생각하는 국어 선생님 모습(긴 생머리를 느슨하게 반 묶음으로 리본을 달아 묶고 긴치마와 블라우스를 매치한 모습이랄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으셨다. 찢어진 눈매에 진한 화장 다물어진 입술은 표독스러운 표정이었다. 삼십 년이 흐른 지금도 마치 어제 뵌 것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와는 다르게 한글사랑이 대단하신 분이셨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기도 전에 어디선가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셔서 맨 끝줄에 앉아있는 아이들부터 차례대로 등짝을 사정없이 스매싱하셨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쉬는 시간 정신없이 재잘대던 소녀들의 수다를 일순간에 집어삼키는 것도 모자라 공포의 도가니를 만들어 버린다. '야!! 이거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입는 거야'

'미친것들!! 외래어 잔뜩 표시된 티셔츠 입으면 너희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우리말도 제대로 모르는 것들이 꼴값을 떨어요' 이유 인즉은 그 당시 유행처럼 번진 티셔츠 뒤에 어법이 맞지 않게 세겨진 옷을 입은 아이들이 표적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한차례 후폭풍이 몰아친 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선생님은 김소월의 진달래 꽃,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낭창한 목소리로 암송하셨다. 그날의 스모키 화장과 유독 돋보이는 형형색색 덧발라진 뾰족하고 길게 자란 손톱, 표독스러운 미세한 얼굴 표정까지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어른으로 성장한 뒤에 나는 그 시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비로소 한글사랑이 남달랐던 선생님의 모습과 외국 향수를 짙게 불러일으켰던 선생님의 이중적인 모습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며 혼란에 빠졌다. 자신의 모습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도가 아무리 좋았다 하더라도 배려 없이 토해내는 말들이 타인을 마치 죄인처럼 취급하고 주눅 들게 하며 힘들게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올바른 잣대를 들이미는 일들이 얼마나 큰 모순인지 아셔야 했다.

그러나 그땐 우린 너무 어렸고 부당한 것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했으며 진실을 진실되게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나이에도 자신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면서 여러 사람 앞에서 한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며 무례하게 구는 사람을 지금도 종종 만난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해지면 거품을 물고 상대를 인간말종이라며 배려조차 못하는 옹졸한 인간이라고 떠들어 댄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나면 학창 시절 만났던 국어 선생님과 오버랩된다. 자신만 옳고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하여 모든 게 틀렸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그들은 정말 알지 못하는 것일까..


빛바랜 낡은 책 속에 타산지석이란 사자성어가 선명하게 밑줄 그어져 있다. 허나 선명한 밑줄이 무색하게도 언제 왜 누구를 만나 그어놓게 되었는지 뚜렷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필시 이기적인 사람들을 만나고 온 뒤에 분개하며 읽혔던 책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타산지석ㅡ다른 산에서 난 나쁜 돌을 자기의 구슬을 가는 데 사용이 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덕을 연마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이제는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며 조심성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을 향해 무조건 '당신에게 반사!!'를 외치고 싶다. 또 그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내 모습은 어떠했는지 반추하는 기회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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