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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강 Nov 18. 2020

피고석에서

저는 법정에 가면 주로 피고석에 앉습니다. 


저희 사무실은 민사소송에서 주로 피고를 대리하고 있기 때문이죠.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소속되어 있는 로펌에서는 보험회사와 같이 손해배상소송에서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의뢰인 편에서 소송을 진행합니다.  그렇다 보니 재판을 가면 저는 대개 출입문 기준에서 오른쪽, 법대에 앉아계신 판사님 기준으로 왼쪽에 위치한 피고석에 앉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가끔 원고 소송대리인이 되어 원고석에 앉아 있으면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옆 자리가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마치 잘못 앉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축구선수로 치면 본래 포지션이 오른쪽 윙포워드인데, 감독이 오늘 경기는 왼쪽 윙포워드에서 뛰도록 지시한 거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로로서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에서 헤매지 않도록 정신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은 본인이나 축구선수 모두 같은 입장에 있겠지만요. 


소송에서 '피고'는 책임을 추궁당하는 지위에 있습니다. '원고'는 법의 힘을 빌려 피고가 어떠한 법적 의무를 이행하도록 청구하는 지위에 있으며, 피고가 원고에 청구에 따라 법적 의무를 이행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점은 원고가 적극적으로 입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피고가 원고의 청구를 방어하는 것이 더 쉽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고가 본인의 주장이 타당하며 피고에게 책임 내지는 법적 의무가 존재함을 상세하게 입증하지 못하는 이상, 판결에서는 원고의 청구가 기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법조경력이 오래되신 선배님들 말씀에 따르면 옛날에는 원고가 승소하기가 더 쉬웠다고 합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없는 살림에 변호사를 사서 소송을 걸었겠냐'라고 생각하여 재판부가 원고 편을 쉽게 들어주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우스갯소리 같으면서도 묘하게 설득력 있는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피고가 마냥 편하게 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채 재판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피고가 소송에 걸려 소장을 송달받게 되면 소장 송달일로부터 30일 이내에 답변서를 제출해야 할 의무가 생기게 되는데, 해당 기간 내에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에는 원고 무변론 승소판결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원고가 본인 청구의 정당성, 타당성을 어느 정도 입증한 시점부터는 피고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피고가 적절하게 항변하지 않는 경우에는 원고 승소판결이 나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겠죠. 피고 입장에서야 원고가 입증을 하지 못해 기각판결이 나오면 가장 좋겠지만, 원고가 준비를 잘해서 피고의 법적 책임을 충분히 입증하였다면 '배 째라', '나는 인정 못한다.'라는 식으로 버티고 있으면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나면 원고와 피고가 소송비용을 분담하게 되는데, 패소한 쪽이 소송비용을 물게 되기 때문이죠. 피고가 유효한 방어논리나 대책 없이 원고의 정당한 청구에 응하지 않고 소송에서 버티는 경우에는 그냥 원금만 지급하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에서도 법정이자를 포함한 지연손해금, 상대방 소송비용, 본인 변호사 비용을 추가로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고 소송을 진행할 때에는 소송의 진행과정을 잘 살펴 원고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가는 경우에는 의뢰인을 잘 설득하여 적정 금액으로 조정을 시도하거나, 화해권고결정을 받아 지연손해금과 소송비용을 감면받는 전략을 짜는 것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멋지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으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도 피고 측 변호사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본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에서 체스 플레이어가 상대방 수를 한참 계산한 후 본인의 킹을 손가락으로 까딱해서 넘어뜨리면서 패배를 인정하는 장면이 참 멋지게 느껴지더라고요. 저도 패소를 한다면 체스 플레이어처럼 쿨하고 멋지게 패배를 인정하고 싶은데, 현실은 녹록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소송 막바지에는 서면공방으로 너덜너덜한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저 금액이 조금이라도 깎이면 마냥 행복할 뿐이죠.  


저는 사람들 앞에서 '피고 변호사'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곤 합니다. 그러면 몇몇 분들은 저에게 '피고를 위해 변론하면 피곤하지 않아?'라고 물어보기도 합니다. 피고를 위해 변론하면 피곤한 것은 사실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피고는 책임을 추궁당하는 존재이니까요. 피고는 자연스럽게 재판에서 위축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책임이 없다면 억울하고, 책임이 있더라도 억울한 측면이 있고, 상대방 말이 다 맞아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본인이 더 답답하고 부끄러운 게 피고의 입장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재판의 중요한 기능이지만, 성이 잔뜩 나서 소송까지 제기한 상대방과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힌 채 차분하게 사실관계를 정리해 보고, 과거의 오해를 풀면서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화해와 양보를 통해 분쟁을 조속히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해보기도 하는 자리 역시 재판입니다. 그렇기에 피고에게도 변호사가 필요하고, 그 역할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주로 피고석에 앉아서 재판을 진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 당장 내일 예정되어 있는 재판도 그렇고요. '피고석에서'라는 제목은 제가 오래전부터 에세이를 쓴다면 붙이고 싶었던 제목이었습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책임과 답변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하게 될 수 있으며,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책임감 있는 자세로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통해 답변을 찾아내면서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누구나 '피고'로서 인생을 살아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물리적으로 피고석에 늘 앉아있는 저도 마찬가지 입장이고요. 바로 이러한 감상들이 글을 쓰는 동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글을 통해 피고석에서의 감상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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