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 하늘ㅡ김환기>>3
김환기는 전통문화 계승을 주창한 김용준, 이태준, 정지용 등과 긴밀한 교분을 나누며 고미술, 특히 달항아리에 흠뻑 빠져들었고 한국의 전통과 자연을 미학적으로 동일시하며 추상 작업의 근간을 다져갔다. - 큐레이터 태현선
*항아리와 시(1954년) _ 서정주는 당시 김환기가 친교를 나누던 많은 문인 중 한사람으로 김환기는 서정주의 서정적인 시정을 매우 좋아했다. 그가 정갈한 서체로 써 내려간 미당의 시 <기도>는 시인 혹은 시적 영감과 창작을, 사물이 채워졌다 비워지는 항아리에 비유하며 시인으로서의 숙명과 창작의 염원을 함축한 시로, 김환기가 처음으로 시서화 일치를 시도할 만큼 깊이 공감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것은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며 작품과 전통서화의 연결성을 강화시켜주는 만발한 매화다. 이 작품에서 매화는 그림의 다른 정물 요소들을 가려버릴 만큼 화면을 지배하는 중심 주제로, 캔버스의 가장 넓은 면을 자유로운 선과 점의 구성으로 채우는 대담함에서 작가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20년간 이어지는 추상화의 한 과정으로 읽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산(1955년~1956년) - 산은 김환기의 작업 초기부터 만년까지 풍경의 소재로 혹은 자연의 심상으로 지속적으로 다뤘던 대상이다. 이 작품은 붓 터치로 면을 채우거나 삼각형 기호로 나무를 표현하는 식으로 산을 묘사하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유기적이고 자유분방한 선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대상과 배경의 구분이 사라지고 산의 능선과 나무와 달과 태양이 자유로운 선묘로 펼쳐지며 작품은 현저히 추상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자연주의와 멀어진 독립적인 색채도 작품의 추상성을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항아리(1956년) - 도자기 자체의 다양한 둥근 기형과 선반의 수평선을 조형 요소 삼아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애장 도자기를 빼곡히 보관한 성북동 집 작업실 나무 선반을 연상케 한다.
*영원의 노래(1957년) - 피카소가 활동하는 세계 미술의 중심지를 열망하며 1956년 파리로 건너 간 김환기는 아이러니하지만 현지의 트랜드에 영향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전통과 자연에 대한 몰입은 그 노력의 하나로, 이 작품은 그 정수를 보여준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비대칭 격자 속에 구름과 산, 물, 사슴, 학 등의 십장생과 도자기와 매화, 달 등 자신의 대표적인 도상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다. 엄격한 격자 구도의 화면 우측에는 작은 십자 구도를 품은 둥근 원이 배치되어 화면에 변화와 균형감을 동시에 부여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하는 자연과 예술의 영원성을, 김환기는 치밀한 계획이 엿보이는 화면 구성을 통해 일종의 하나의 질서로서 표현한 것이다.
*영원의 노래 2(1957년) - 1956년 파리로 건너간 김환기는 1년 후 1957년에 열린 개인전에서 <영원의 노래>라는 동일한 제목의 유화 두 점을 선보였다. 한 점은 엄정한 격자 구도의 100호 작품이었고 다른 한 점은 푸른 바탕에 산과 달, 구름과 학이 부유하는 듯 열린 구성으로 묘사된 바로 이 작품이다. 작가는 불멸의 십장생 도상으로 자연의 영원성을 표현하고 여기에 '노래'라는 명제를 붙여 다분히 시적인 정서를 작품에 담았다.
*정원 (1957년) - 3년간 파리에서 활동하며 김환기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예술세계를 이루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이 작품에서 다루는 소재들은 모두 그가 서울 성북동 집 뜰에서 즐겨 감상하던 것들과 동일하고 매우 재현적이다. 그러나 매병부터 학, 달항아리와 한옥 대문, 푸른 달까지 이어지는 수직 배열, 그리고 흩어진 요소들을 중앙의 넓은 반월형 색면으로 연결하며 통합하는 구성, 당시 많이 사용하지 않던 노란색을 주조로 한 점이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 것임을 보여준다.
*산월(1958년) - 달을 품은 산을 그린 듯한 작품은 파리 체류 후반의 작품이다. 이 시기부터 김환기는 이전 10여 년간 집요하게 몰두했던 도자기보다는 산과 달을 빈번하게 다루고, 굵은 선과 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추상을 더욱 심화해 갔다. 이 작품은 굵고 힘 있는 선들을 중첩해 깊은 산세를 추상적이면서도 공간감 있게 담고 있는데 무엇보다 달의 위치가 눈길을 끈다. 깊은 산속 호수에 투영된 보름달일까, 그저 산을 밝히는 달빛의 상징적인 표현일까, 혹은 산과 달을 하나 된 자연으로 표현한 것일까. 그 어느 것이든, 이러한 해석과 상상의 틈에서 이 작품의 시정은 풍부해진다.
*여름 달밤(1961년) - 고향 섬 기좌도를 소재로 푸른 달밤 아래 섬과 바다의 정경을 담은 작품. 고도로 양식화하여 거의 기호에 가까워진 산과 물, 구름 같은 풍경의 요소들이 원과 사각형 안에 밀집되어 있고, 이 세 개의 도형은 주위의 여유로운 색면 배경과 뚜렷이 구분된다. 그중에서도 왼편의 사각형은 백제 산수문전의 문양을 연상시키는데, 이번 전시를 계기로 발견된 김환기가 소장한 백제산수문전 탁본이 그 연관성을 뒷받침해 준다. 이 그림에서 주목해 보았으면 하는 것은 섬 앞 바다에 나타난 작은 사각 점들이다. 이렇게 씨앗처럼 숨어 있던 작은 점들이 60년대를 거치며 점차 발아하고 성장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